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강론자료

4월 4일(주일)-수난성지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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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4-04-03 ㅣ No.625

사순 제 6 주일 (주님의 수난성지주일)

 

        (본미사)  이사야 50,4-7     필립 2,6-11     루가 22,14-23,56

    2004. 4. 4.

주제 :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미사에 함께 하신 교우 여러분!

오늘은 사순 6주일 주님의 수난성지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어 하려던 일, 즉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몸을 바쳐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안겨주신 성주간의 첫 날입니다.

 

올해 사순절에 개봉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 영화는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와 다른 환경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을까?’하는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한다면 그 끝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신앙인으로 사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길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기쁘거나 즐거움을 표현한 영화는 절대로 아니었기에,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구원완성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했을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예루살렘 입성기념일인 오늘 루가복음 수난기를 읽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오래 전에 단 한번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으로 나신 분으로서 우리보다 앞서서 그 고통과 고난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편하고 쉬운 것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인간이기는 합니다만 인간이면서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며 무시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이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잊지 않고 산다고 말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었다거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면 아는 것처럼 예수님도 게쎄마니 동산에서는 가능하다면 그 고통과 수난의 순간을 피하려고 애쓰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고통을 이겨내시는 자세를 보여주십니다.  영화 속의 대사입니다만, 예수님과 성모님이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는 부분에서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보십시오. 어머니!  저는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도 고통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이 고통들 가운데는 때로는 큰 상처를 남기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그 고통 앞에서 지치고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 영향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포기하고 자살로 생을 끝내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통을 불러들인 삶의 선택은 내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에 많고 적은 분량이야 있겠습니다만, 잘 살려고 하는 우리가 배 아파서 하느님이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삶에 찾아온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신앙인으로 머무는 동안에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다가온 고통을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십니까?  제가 드린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고통과 맞부딪혀서 고통을 분쇄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쉽거나 편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사는 동안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방법은 빼고......’라는 자세로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그 방법은 선택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는지, 톨스토이가 쓴 우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이리 폴짝 저리 폴짝 하다가 그만 졸고 있던 늑대 바로 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벌떡 일어나서 다람쥐를 잡아먹으려고 했고, 다람쥐는 늑대에게 싹싹 빌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놓아줘!”라고 말하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럼 너를 놓아주지.  그런데 말이야, 너희 다람쥐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즐거운지 내게 좀 알려주어야 해.  내 주변에 친구도 없어서 난 늘 심심하거든.  너희들은 거기 위에서 언제나 놀이를 하면서 폴짝거리고들 있잖아.”

그러자 다람쥐가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나를 나무 위로 갈 수 있게 해주면 그곳에서 말해줄게.  나는 네가 무서워서 말도 안 나와!”  그 소리에 늑대가 다람쥐를 놓아주자 다람쥐는 나무위로 가더니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너는 심술궂어서 늘 심심한 거야.  심술이 너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거든.  우리가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착하고 아무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늘 수난복음을 통해서 고통을 대하신 예수님의 자세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 상태로 몰았던 일부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나름대로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멀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받아들이셨던 삶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신앙의 정신으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자세로 신앙인으로서 올바르게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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