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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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이일언 욥과 이태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와 김화춘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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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563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이일언 욥과 이태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와 김화춘 야고보

 

 

얼마 전 전주 숲정이(시도기념물 제71호, 전주시)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숲이 칙칙하게 우거진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숲정이는 지난 호에 소개한 신태보 베드로 순교자를 비롯하여 이번 호에 소개할 이일언 욥, 이태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한 곳입니다.

 

 

2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순교한 이일언 욥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일언 욥(1767-1839년)은 부친에게서 신앙을 배워 익혔습니다. 신유박해(1801년)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고, 10년 동안 옥에 갇혀 모욕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신자답게 인내로 이겨내었고, 그 결과 편견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 안의에서 살다가 1826년 5월 전라도 임실군 대판 마을로 이주하였습니다.

 

정해박해(1827년)가 일어났을 때, 피신하지 않았던 그는 사람들에게 “전에 순교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귀양을 간 것이 분해 죽겠습니다. 지금은 이런 외딴 곳에 와서 살기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하면서 순교를 갈망하였습니다. 사흘 뒤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기쁘게 따라갔습니다.

 

몸집이 보잘것없던 그는 심한 매질을 당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가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일세.”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일언은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옥에서 살았습니다.

 

1839년 5월 29일 사형지인 숲정이로 가는 동안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했는데,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간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내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도 언제까지나 훌륭한 교우가 되어라.”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풀려난 이태권 베드로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태권 베드로(1782-1839년)는 부모님에게서 신앙을 배워 익혔습니다. 그의 부친 이무명은 신유박해(1801년)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가서 3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삼촌은 1812년에 홍성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입니다. 이태권은 신해박해(1791년)와 신유박해(1801년) 때, 그리고 이듬해에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신자로서의 본분을 착실히 지키며 살았던 그는 정해박해(1827년)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피할 길이 없었고, 가족들 때문에 떠날 처지도 못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얼마 뒤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어떤 교우들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그가 필사한 교회서적을 보았다고 진술한 것 때문에 훨씬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드러냈습니다. 얼마나 꿋꿋이 신앙을 드러냈는지, 감사가 “저놈이 계속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니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태권은 12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동료들과 함께 1839년 5월 29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동생을 따라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김대권 베드로(?-1839년)는 공주에 가서 옹기점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꿈에 부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호랑이에게서 아내를 구해냈습니다. 이튿날 그는 부인과 화해를 했고, 화목하게 살아갔습니다.

 

주일마다 그는 이웃들에게 권면하고 가르치면서 사순절과 성탄절에는 더욱 희생과 기도로 지냈습니다. 그는 동생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에서 순교할 때 사용된 나무토막을 집에 보관하면서 가끔 그 위에 턱을 고이곤 했습니다. 이렇듯 순교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는 정해박해(1827년) 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있고, 뼈를 부수면 뼈한 조각 한 조각에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형벌을 받을 때 몸에서 피가 시냇물 흐르듯 하는데도, 열심히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한 꿋꿋한 의지와 평온한 기색으로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빛과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머리털 한 가닥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면서 순교 원의를 드러냈습니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굽힐 수가 없음을 알고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습니다. 김대권은 12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1839년 5월 29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권의 동생으로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

 

김대권의 동생 김화춘 야고보는 성격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양과 보령에 살 때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고, 언제나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을해박해(1815년)가 일어났을 때 그는 청송 일대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안동, 경주, 대구로 이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김화춘은 혹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던 그는 김종한 안드레아 등과 더불어 1816년 11월 1일 대구 형장인 관덕정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일언 욥은 이 세상에서 참다운 천주교인으로 살다가 천국으로 떠나갔습니다. 박해 중에 여러 번 체포되고 감옥생활을 했던 이태권 베드로 순교자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내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김대권 베드로 순교자는 이미 순교한 동생 김화춘 야고보를 뒤따르기를 갈망했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한 해를 마감하면서 순교자들처럼 살아왔는지 반성하며 다시 용기를 내셨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7년 12월,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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