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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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이스라엘: 복음의 길을 가다 (상)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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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9 ㅣ No.1047

[복음의 길을 가다] (상)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절망의 절벽산에서 유유히 내려와 희망의 타보르산 바라보며



- 나자렛 입구 절벽산 정상 아래에서 시작하는 복음의 길 출발 지점. 현무암을 4~5개 쌓아 올리고 제일 위에는 복음의 길 상징 로고를 새겨 이 길이 복음의 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성지 이스라엘에 새로운 순례길이 열렸다. 예수의 고향 나자렛에서 활동 중심지인 카파르나움까지 걸어서 순례할 수 있는 "복음의 길"(The Gospel Trail)이 조성됐다. 62km에 이르는 이 순례길은 이스라엘 관광청과 이스라엘 국립공원 등 관련 당국이 2000년 전 예수 시대 때부터 이용해온 기존의 길을 순례자들 편의와 현지 여건을 감안해 개발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일반에게 개방하기 시작한 이 복음의 길 주요 여정을 3회에 걸쳐 도보 순례기 형식으로 소개한다.

 

복음의 길은 나자렛 입구 절벽산에서 출발한다. 절벽산은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거부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아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그 산이다(루카 4,29~30). 일명 추락산이라고도 하는 높이 397m 절벽산 정상에 서면 산 아래로 이스라엘 최대 곡창지이자 구약 시대에는 격전지이기도 했던 이즈르엘 평야가 펼쳐져 있고, 왼쪽(동쪽)으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일어난 타보르 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오른쪽(서쪽)으로는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을 물리친 카르멜 산 줄기가 멀리 모습을 드러낸다.


- 절벽산 경사면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조성된 복음의 길. 길을 내려가면서 이즈르엘 평원뿐 아니라 예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행하신 나인(루카 7,11-17) 동네도 볼 수 있다.

 

 

산 정상에서 주차장 쪽으로 300m가량 내려오면 복음의 길이 시작한다는 표지석이 보인다. 현무암 돌덩이 5개가 포개져 있고 제일 위에 있는 돌에는 영어와 히브리어로 "복음의 길"이라는 글씨와 함께 닻 모양이 표시돼 있다. 닻은 그리스도교 상징이다.

 

표지석 옆으로 조성된 복음의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내려오면 산기슭에 이르게 된다. 산 정상에서 산기슭까지는 2km 정도로, 천천히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하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상념은 2000년 전으로 헤집고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나자렛에서 시작해 갈릴래아 호수 일대를 포함하는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변방이다. 이민족의 땅이다. 그분은 정통 유다인들이 멸시하고 배척하는 지방 갈릴래아에서 제일 먼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 소문이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고, 그분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절벽산 정상에서 본 나자렛 전경. 예수 시대에는 산 속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인구 1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됐다.

 

 

하지만 고향 나자렛을 찾으신 예수는 뜻밖에도 고향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받으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기는커녕 고을 밖에 있는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려고까지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고 복음서는 전한다.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 나오신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힘들 때는 잘 알던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을 때다. 불신을 당했을 때다. 그럴 때면 배반감에 분노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때야말로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유유히 빠져 나오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격노하고 울분을 터뜨리거나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산비탈에서 벼랑 위를 올려다본다.

벼랑 끝에서 빠져나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갈릴래아 호숫가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신다.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카파르나움을 향해 절벽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것은 낮은 데로 향하는 것이다. 배척을 받았을 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다. 비탈을 따라 내려오는 길가에는 개양귀비와 아네모네를 비롯해 야생화들이 피어, 그렇게 다짐하는 길손을 반긴다.

 

- 절벽산에서 완전히 내려와서 본 타보르 산과 그 앞 마을 다부리야와 익살. 길 옆에 핀 꽃들은 야생 겨자다.

 

 

군데군데 서 있는 표지석의 안내를 받아 산기슭에 도달한다. 복음의 길은 여기서 북동쪽으로 이어진다. 돌덩어리를 쌓아 올려 만든 표지석이 있으니 길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산기슭에서 정면으로 마을들이 보이고 마을 뒤에 표주박을 엎어 놓은 것처럼 봉긋 산이 솟아 있다. 솟아 오른 산은 타보르 산이고, 마을들은 하나로 보이지만 실은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앞쪽 마을은 "익살"이라는 아랍인 마을이고 뒤쪽 마을은 타보르 산 기슭에 위치한 다부리야다. 다부리야는 구약의 여예언자이자 판관인 드보라(판관 4장)의 이름을 딴 마을이다.  

복음의 길은 익살 마을 뒤쪽을 통과해 케슬롯 산과 역시 판관 드보라의 이름을 딴 드보라 산기슭을 끼고 계속 북동쪽으로 이어지면서 상수리나무와 소나무들로 우거진 삼림지대를 지나쳐 텔 고벨이라는 언덕 근처에까지 이른다. 텔 고벨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이사카르 지파와 납탈리 지파의 경계 지대에 위치한 고대 도시 아즈놋 타보르(여호 19,34)가 있던 언덕이다.

흥미로운 것은 절벽산 아래에서 텔 고벨에 이르기까지 16km에 이르는 "복음의 길"에서는 숲이나 건물에 가리지 않는 한 어디서든지 타보르 산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길을 다녀본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다 보인다고 해서 "다볼" 산이라고 부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진다. 볼록 솟아 오른 타보르 산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복음의 길을 따르는 순례 여정에서 좋은 묵상거리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마태 17,1-9; 마르 8,2-10; 루카 9,28-36)을 수난 예고(마태 16,21-23; 마르 8,31-33; 루카 8,22)에 이어 전한다. 스승이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까?

우리는 지금 절벽산을 내려와 카파르나움으로 향하는 순례 여정에 있다. 인생길에서 배척당하고 거부당했을 때 분노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유유히 빠져 나오는 삶의 지혜를 갖자고, 겸손함을 배우자고 다짐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언덕길을 오르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걸어야 한다. 발에는 물집이 생기고, 힘들고 지친다. 주저앉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그럴 때 고개를 들면 타보르 산이 보인다. 거룩한 변모의 산, 영광의 산이다. 타보르 산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산이다. 인생살이가 제아무리 고달프고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 희망의 봉우리를 굳게 간직한다면 결코 쓰러지거나 좌절하지 않으리라. 혹시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타보르 산을 바라보면서.

[평화신문, 2012년 8월 12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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