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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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신태보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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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562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신태보 베드로

 

 

전면적이고 대대적이었던 신유박해(1801년)는 교회를 거의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 박해로 교회 지도층을 포함한 많은 신자가 순교하거나 유배를 갔습니다. 이 박해가 끝난 뒤 누구보다 용감하게 교회 재건운동에 참여한 이가 신태보 베드로입니다. 그는 지난 호에 소개한 최 바르바라(1790-1839년)의 시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성사를 갈망하며 성직자 영입을 추진

 

신유박해 후, 그는 그가 사는 마을에서 12km 떨어진 용인지방에 순교자 유족 세 가정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네댓 번 그들을 찾아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주일 의무를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 성사를 받았던 유족들은 그에게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와 신부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신부님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들을 천사들처럼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자 다섯 가구 40여 명과 함께 여드레 동안 걸어서 강원도 어느 산골로 갔습니다. 산골에 자리를 잡자마자 추운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가져온 식량이 바닥이 나고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인자하신 하느님의 보호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성사의 중요성을 아는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시급한 일로 여기고 추진하였습니다. 그래서 1811년 교황과 북경주교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그도 서명을 하였습니다. 북경에 가기로 된 밀사는 사촌인 이여진 요한이었습니다. 신태보는 그를 위해 경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하였습니다. 아들이 최 바르바라와 결혼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옥중수기를 작성하고 참수

 

1827년에 전라도 곡성에서 정해박해가 일어났는데, 박해의 불길이 전라도를 넘어 경상도까지 번졌습니다. 그는 4월 22일 전주에서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전주감영에서 심문을 받던 신자들이 교회서적을 압수당했는데, 그 책 가운데 여러 권의 필사자가 신태보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전주로 압송된 그는 관장에게 “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를 따를 뿐입니다. 순경에 있을 때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에 처해서는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당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에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는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기에, 엄청난 형벌(가위주리, 줄주리, 줄톱질 등)을 당해 앉을 수도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5월 5일 그는 관장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 우리나라 약을 써서 효력이 없으면 중국에서 들어온 약을 써서 가끔 병을 고치게 됩니다. 사람은 각기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영혼의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 없이는 이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는 우선 마음속을 다스리고 칠극(七克)과 천주십계로 안과 밖을 모두 지도합니다. 사실 우리 교는 공자와 다른 성현들의 가르침을 완성한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이성은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가지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토론을 할 적에 어떤 사람들은 상대편보다 먼저 참된 이치를 발견하듯이, 교리 문제에서도 정부가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 백성이 먼저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지금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2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용맹한 신앙심으로 버티며 그는 샤스탕 신부의 요청대로 옥중에서 겪은 진상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내 다리는 하도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나는 앉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였다. 매일 그저 물을 두세 탕기 먹을 뿐이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으며, 더구나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라 아무도 내게 근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가 부축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고, 이들은 또 가끔 내가 있는 골방을 치워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넉넉히 감사할 수 있겠는가.”

 

이 옥중수기는 당시 옥중생활을 소상하게 전해줄 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신자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의 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1839년 4월 17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습니다.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왔지만 신앙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신태보 순교자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줍니다. 성사를 갈망하여 성사 받은 신자들을 천사들처럼 사랑한 그는 배교의 위협 앞에서 당당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힘차게 증언했으며, 옥중기록을 남겨 후대 신자들에게 신앙에 관한 귀한 자료를 전해주었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은 우리에게 신태보 순교자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교회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가기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11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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