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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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7) 교토 가와라마치성당 미야코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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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14 ㅣ No.1502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 ⑦ 교토 가와라마치성당 “미야코의 성모상”



앞서 소개한 교토 가와라마치성당에는 선조들의 신앙의 증거로 남겨진 소중한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아기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상이다. 오래 전부터 이 성모상은 “미야코(都: 도읍지)의 성모상”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다. 그렇다면 이 성모상에 얽힌 어떤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일까?
 
1549년 처음으로 일본에 선교하러 온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선교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일본을 떠나게 되었고,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천주교 금교령이 풀리게 되자 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또 다른 선교사들이 유럽에서 일본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명치유신1)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여전히 천주교 선교의 허가는 받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순교자들의 기록을 보게 된 프랑스의 레옹 로뱅(Leon Robin) 신부는 복음을 전하는 사제, 즉 선교사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어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 뒤 1862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일본의 순교자 26명이 시성되자 이에 용기를 얻은 로뱅 신부는 성모님께 봉헌할 성당을 교토에 세우고 싶어했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선교하러 갔을 때 가지고 갔던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모방해서 무릎 위에 아기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동상 6개를 로마에서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1865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축복을 받은 후 그 중 하나의 성모 마리아 상에는 “미야코의 성모상”이라는 이름을 지어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데, 그 성모상이 바로 지금도 변함없이 교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성모상이다.

로마에서 만들어진 이 성모상은 프랑스를 거쳐 1866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神奈川縣橫浜)에 있던 페트 지라르(Pete Girard) 신부의 손에 들어게 된다. 그런 다음 다시 이 성모상은 한 선교사의 손을 통해 교토까지 오게 되지만 여전히 교토에서는 선교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황이어서 끝내 그 선교사도 교토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언젠가 교토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때 이 성모상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하며, 꼭 그런 날이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1873년 비그루(Vigroux) 신부는 루이스 하라다(原田)라는 일본 청년과 함께 히가시야마 쇼군즈카(東山將軍塚)에 그 성모상을 묻고 만다.
 
히가시야마 쇼군즈카라는 곳은 칸무 천황(桓武天皇: 제50대 천황, 737-806년)이 헤이죠교(平城京:나라현)에서 나가오까교(長岡京: 교토부), 그리고 헤이안교(平安京: 교토부)로 도읍지를 두 번이나 옮겼는데 그 때 귀족출신이자 칸무 천황의 충신(忠臣)이었던 와케키요마로(和氣淸麻呂)가 흙으로 만든 장군에게 갑옷을 입혀 땅 속에 묻어놓으면 그 흙으로 만든 장군이 새로운 도읍지를 지켜줄 거라고 제안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 흙으로 만든 장군 덕분일까? 794년 헤이안교에 도읍지가 옮겨진 후 1869년에 정부가 도쿄에 이전을 할 때까지 무려 1075년 동안 교토에 도읍지가 있었던 셈이다. 지라르 신부도 이미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에 쇼군즈카가 교토를 지켜줄 성모상을 묻어두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로 택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쇼군즈카는 교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지금도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일이 있고 몇 년 뒤, 마침내 교토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왔고 이때 교토에 최초로 부임한 신부가 바로 빌리옹(Villion) 신부였다. 그는 교토에 와서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교토 사람들과 친해지는 가운데 선교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예전에 들은 적이 있던 미야코의 성모상 이야기가 떠올라 쇼군즈카에 올라가 기도를 하면서 그 곳에 묻혀 있던 성모상을 찾아냈다. 선교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담긴 미야코의 성모상은 빌리옹 신부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890년 교토 가와라마치성당의 축성식 날, 이 미야코의 성모상과 그 유래가 처음으로 축성식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소개되었다. 그 후 100년이 넘게 지난 2004년 9월, 미야코의 성모상에게 봉헌된 교토 가와라마치성당의 소성당(가와라마치성당 지하)에는 미야코의 성모상이 안치(安置)되었고, 미야코의 성모상과 똑같은 성모상을 하나 더 만들어 대성당에도 모셨다.

아기예수님을 안고 있는 상냥하고 따뜻한 표정의 성모 마리아는 지금도 여전히 교토 카와라마치성당 지하에 마련된 소성당에서 기도하러 오는 많은 이들에게 기도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있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1) 명치유신(明治維新): 19세기 후반 장군 도쿠가와가<德川家>가 다스린 에도막부<江戶幕府>가 해체되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한 중앙통일 국가가 확립됨으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혁의 과정을 총칭한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7월호,
이나오까 아끼(쥴리아, 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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