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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원경도 요한, 최창주 마르첼리노, 최조이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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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561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원경도 요한, 최창주 마르첼리노, 최조이 바르바라

 

 

지난 호에 이어 여주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등과 함께 순교한 원경도 요한, 장인인 최창주 마르첼리노와 그의 딸 최조이 바르바라를 만나보겠습니다.

 

 

사촌의 도움으로 배교 유혹을 물리친 원경도

 

원경도 요한(1774-1801년)은 사촌 이중배 마르티노에게서 1797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그는 곧고 확고부동한 성격을 가졌고, 절제의 덕은 주목할 만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되어 여주 관아에 도착하자 관장은 형벌을 가하면서 신자들을 밀고할 것과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죽을지라도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천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감옥에 있던 어느 날 늙은 여종이 옥으로 와서 늙으신 어머님과 부인이 슬퍼하는 사정을 전하면서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오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관장의 말과 형벌에는 용기를 내어 이겨냈지만, 아들과 남편을 잃은 가족의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중배는 즉시 요한을 도우러 왔습니다. 이중배가 요한 곁에 서서 그 여종을 무섭게 쏘아보자, 그녀는 겁을 먹고 물러갔습니다. 그녀는 “이중배의 눈빛이 무서워 다시는 못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신앙이 굳은 이중배가 있었기에, 배교 유혹을 물리치고 신앙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1801년 3월 13일 동료들과 함께 여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한, 원경도의 장인 최창주

 

원경도 요한과 함께 순교한 이 가운데 요한의 장인인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년)가 있습니다. 그의 두 딸 가운데 하나가 원 요한과 결혼하였던 것입니다. 마르첼리노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해박해(1791년) 때 체포되어 경기도 광주로 압송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배교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깊이 뉘우치면서, 가족과 이웃들에게 힘써 신앙을 권면하였습니다.

 

다시 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어머니가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마지못해 서울로 길을 떠났습니다.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용감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에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섯 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밀고할 것을 강요당하자, 그는 “저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십계명중) 5계명을 어기게 할 것이므로, 저는 누구도 고발할 수 없습니다.” 하고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자, 그는 “모든 사람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천주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는 매질로 죽더라도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가혹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한 달에 두 차례씩 태형, 몽둥이로 찌르기, 다리 주리질 같은 고문을 받아야 했는데, 그의 온 살점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감옥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습니다.

 

한 번은 감사가 온유한 말로 그를 설득하면서, 단 한 마디만 말하면 즉시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모든 인간의 크신 임금이요 아버지이신 분[大君大父]을 섬기기 시작한 다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를 부인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결국 제 목숨을 그분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경기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최후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면서, 사형선고를 거룩한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제헌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은총을 얻으려고 기도와 모든 본분을 실천하는 데 노력을 배가하였습니다. 이에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사위 원 요한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부친과 시아버지의 순교의 삶을 보고 들었던 최조이

 

최창주의 딸 최 바르바라(1790-1839년)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부친이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뒤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신앙이 굳건한 신태보 베드로 회장의 아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그녀는 얼마 뒤 안타깝게도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최조이라고 불렸습니다. 조이[召史]는 과부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늙으신 시아버지를 끝까지 모셨습니다.

 

시아버지가 정해박해(1827년) 때 체포당해 전주감옥에 갇히자 그녀는 친척과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면서 정성을 다해 시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기해박해(1839년)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 살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생활하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전주로 압송된 다음 문초와 형벌을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전라감사에게 부친은 1801년도에, 시아버지는 1839년 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에 감사가 “너는 죽는 길밖에 없다.”고 하자,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 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839년 11월 30일에 참수형으로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나약함을 드러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원경도 요한의 삶은 우리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감옥생활에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장인이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친과 시아버지의 순교의 삶을 보고 들은 최 바르바라는 배운 대로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신앙을 굳게 하면서 하느님께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10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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