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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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이중배 마르티노와 조용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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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560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이중배 마르티노와 조용삼 베드로

 

 

황사영 알렉시오가 쓴 백서를 읽으면서 초기 순교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박해자들에게도 당당했고 신자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던 이중배 마르티노와 그의 권고로 순교를 택한 조용삼 베드로의 삶과 신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슴속에 불타지 않는 책을 갖고 산 이중배

 

용기 있고 호쾌한 기개가 있던 여주 사람 이중배 마르티노는 친구를 따라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입교하면서부터 그의 열심은 타오르는 불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담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800년 부활대축일에 사촌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큰 소리로 부활삼종기도를 바친 뒤, 개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또 성가를 부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였습니다.

 

얼마 뒤 그는 체포되어 여주감옥에 갇혔습니다. 의술을 갖고 있던 그는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께 기도한 뒤 침을 맞거나 약을 쓰도록 했는데, 낫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을 관장도 병이 나면 약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옥문 앞이 장터 같았고, 그 효험을 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옥리가 와서 의학책을 보자고 하였을 때, “나는 의학책이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마땅히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였습니다. 옥리가 “천주교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을 가지고 배운단 말이오?”하고 묻자, 그는 “내 가슴 안에 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오히려 남들을 가르쳐서 천주교를 받들 수 있도록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하였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친께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설득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의 옥중생활에서 그는 기도하며 교회서적을 필사하였고 사람들에게 교리를 강론하면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러자 옥졸 하나가 마음이 움직여 열심히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800년 10월 이중배와 그의 동료인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임희영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듬해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나면서 경기감사는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3월 13일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에서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내인 조희는 남편에게서 천주교를 배운 죄로 울산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교회 어른의 칭찬과 권고로 다시 일어선 조용삼

 

양근 사람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조용삼 베드로는 나이 서른이 되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쇠약하고 외모도 보잘것없는데다가 세상일에 어둡기까지 하여 남들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명도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만이 그의 큰 열심을 칭찬하였습니다. 정약종은 그의 허약한 몸 안에 있는 위대한 영혼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그를 깊은 존경으로 대하며 그의 신앙과 덕행을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큰 어른에게 칭찬을 받은 그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1800년 4월 부친 조제동과 함께 이중배가 사는 여주 고을에 갔다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여주관아에서 형벌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한 태도를 보이자, 관장은 “네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 네 아버지를 때려죽이겠다.”고 하면서, 부친을 데려다가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하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저는 인륜을 끊을 수 없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기를 원치 않으니, 우리 둘 다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굴복하였습니다.

 

석방이 되어 감옥 문을 나서던 그는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중배는 그의 나약함을 책망하며 빨리 통회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는 부친에 대한 효도 때문에 진 것일 뿐, 신앙은 그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그는 진심으로 마음을 돌이켜 죄를 뉘우치고 다시 관아로 들어갔습니다. 크게 노한 관장은 그에게 다른 사람과 달리 가장 많이 가장 혹독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관장이 그의 외모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업신여겨 ‘이러한 자는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굳건한 모습을 보이자 미움이 특히 심하였던 것입니다.

 

11개월을 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가 남긴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은 매우 많았습니다. 1801년 2월 경기감영에서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하자, 그는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일 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달리 말씀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2월 14일 그는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에 불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포졸들과 많은 구경꾼들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갔더니 불이 아니라 이상한 광채가 무덤 위에서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자들은 그에게 크나큰 공경을 드렸다고 합니다.

 

가슴속에 불타지 않는 책을 갖고 있던 이중배 마르티노는 교회의 소중한 가르침을 믿는 그대로 살았습니다. 또한 부족함을 갖고 산 조용삼 베드로는 잠시 넘어졌지만 교회 어른의 칭찬과 권고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9월 순교자성월에 두 분의 신앙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9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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