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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중국교회 역사와 중국교회 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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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9 ㅣ No.559

중국교회 역사와 중국교회 성인들

 

 

당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교회 역사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된 지는 1,300여 년이나 된다. 천주교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그 확고한 증거가 바로 1623년(明熹宗天啓三年) 서안(西安) 부근에서 발굴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100년 동안 많은 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한 결과 비문에 기록된 내용인 경교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전파되어 얻은 칭호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와 기타 관련된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당태종 정관(貞觀) 9년(635년) 경교의 선교사 아라본(阿羅本)이 서안에 와서 최초로 경교를 전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천주교의 시작이다. 태종이 상당히 특별한 예우 표시로 총신 방현령(房玄齡)을 보내 경교 선교사 아라본을 장안으로 영접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관 12년(638년) 태종은 지시를 내려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 하나를 지으라고 분부했으며, 당고종도 여기저기에 대진사를 지으라고 하고 동시에 아라본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책봉하였다. 이후 경교는 한때 극성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비문이 말하듯이 “법류십도(法流十道: 교의는 여러 계층에 전파되며)”, “사만백성(寺滿百城: 사찰은 여러 도시에 건설된다)”일 정도였다.

 

회창(會昌) 5년(845년), 당무종이 명령을 내려 유교를 없애자 경교도 역시 연루되어 사찰이 폐쇄되고 선교사 2,000여 명이 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 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 변방지대에서는 유행했지만 내지에서는 400년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13세기 말 원나라 때 천주교가 다시금 전래되었다가 원왕조의 멸망과 함께 맥이 다시 끊어지고, 본격적인 의미의 전래는 1582년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10월 1일 중국순교자 시성식

 

2000년 10월 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중국교회 순교자 120명의 시성식이 있었다. 선국새(單國璽) 추기경님을 비롯한 중국대만주교단은 중화순도복자(中華殉道福者) 시성위원회를 만들어 순교자들의 역사자료 수집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국 순교복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 행사도 촉진시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0년 대희년 10월 1일 120명의 중국 순교복자들의 시성식을 올려주셨다. 이것은 중국교회 역사상 경축할 만한 경사다. 이때부터 우리 중국인들도 우리만의 순교성인들을 모시게 되었다.

 

2002년 1월 하순쯤 대만지역의 주교들이 교황님께 술직(述職, 사도좌 정기방문)하러 로마에 가있을 때, 교황청 경신성사성 장관을 맡고 있던 메디나 추기경은 7월 9일을 중국 순교성인 곧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趙榮)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로 정해 전 세계교회에 알리기로 했다고 전했다. 중화교회는 주교단의 권한으로 이 기념일을 대축일로 올릴 수 있으며, 7월 9일 가까운 주일에 거행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순교하신 첫 순교자 스테파노부터, 200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역사적인 일뿐 아니라 각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의 진리를 위해 반드시 탄연(坦然)히 나서야 할 일이다. 중국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숫자가 아주 가관(可觀)이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피살된 신자들만 해도 2만 명이 넘는다. 교황님이 공식적으로 시성을 허락하면서 보편교회와 함께 모시게 한 중국 순교자들은, 1684년 첫 번째로 순교하신 유방제 신부를 비롯해 1930년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혜여(高惠黎) 신부까지 포함됨으로써, 지난 400년 동안 순교하신 모든 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교황님이 2000년 10월 1일을 중국 순교성인 시성식 날짜로 택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로 소화 데레사 성녀는 살아있는 동안에 중국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돌아가신 뒤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장미 꽃비처럼 중국 땅에 내리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120명 성인 중에 중국인은 87명이고, 나머지 33명은 중국 땅에서 순교하신 외국 선교사였다. 주교 6명, 신부 23명, 신학생 8명, 수녀 7명, 평신도 76명(예비신자 2명 포함)으로 최고령은 79세, 가장 어린 아이는 일곱 살밖에 안 되었다. 평신도들 중에는 평신도 전도원(傳道員), 가정주부, 가정에서 봉헌생활을 하는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 등 중국 여러 계층과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 사제

 

성 자오롱(趙榮) 사제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고 원래 성은 주(朱) 씨였다. 1746년 귀주(貴州)에서 태어났으며 1815년 정월 27일 순교하셨고 향년 69세였다. 젊었을 때는 좀 방탕하였는데 20세 때 옥졸(獄卒)이 되었다. 천주교가 사천(四川)에 막 전해졌을 때라 신자들이 조금씩 생길 때였는데, 1772년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은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

 

2년 뒤 매 신부라는 선교사가 새 영세자들을 격려하러 그 지역에 갔다가 그도 잡혔다. 감옥에서 매 신부님이 열정적으로 진도(眞道)를 전파하는 모습에 많은 죄수들이 감동했는데, 죄수를 지키고 있는 주영(朱榮)도 그것을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는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아 며칠 안 돼 교회교리를 배워 믿게 되었다. 나중에 매 신부님이 감옥에서 나갈 때 신부님을 배웅하러 가면서도 신부님과 교회교리를 계속 나눴다. 매 신부님은 1776년 그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견진성사도 베풀었다.

 

매 신부님은 그가 신앙심이 굳건한 것을 보고 많은 일을 부탁했고 라틴어도 가르쳤다. 그리고 그에게 성현의 책들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다른 신부님 한 분도 그의 믿음을 보고 위독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게 하는 등 많은 일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성실한 그의 성격과 굳건한 믿음을 보고 주교님께 사제서품을 청했다. 그래서 1781년 음력 5월 10일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고 성도 조(趙) 씨로 바꿨다.

 

사제가 된 뒤에 그는 아주 착실하게 교리와 성사를 이행하고 간절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권유하면서 박해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목숨을 바쳤다.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1900년 5월 27일 복자품에 올랐고(천주교대만지구주교단 시성위원회 편집,“中華殉道聖人傳”, 77-79쪽,台北:天主敎敎務協進會,2000년 5월 초판),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자오롱 사제를 중국 순교복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올려주셨다.

 

* 왕건공(王建功) 안토니오 중국 산서 태원(太原)교구 신부. 1999년 5월 한국에 와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 2001년 서울에서 부제품을, 2002년 8월 17일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지금은 한국에 머물며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9월호, 왕건공(중국 산서 태원(太原)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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