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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홍낙민 루카와 홍재영 프로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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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558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홍낙민 루카와 홍재영 프로타시오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1814-1866년)가 1865년에 쓴 간찰을 얼마 전에 직접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855년 3월 중국에 가서 베르뇌 주교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을 모셔왔고, 1861년부터는 주교님을 모시면서 교회의 일을 도왔으며, 병인박해 당시 러시아의 위협에서 나라를 구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애를 쓰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서한은 초서로 쓰여서 자세한 내용은 판독을 해야 알 수 있지만, 안부를 묻는 편지 같았습니다. 그 서한을 대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 순교자의 친필 서한을 직접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1780-1839년)이고, 할아버지는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홍낙민 루카(1751-1801년)입니다.

 

 

벼슬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 홍낙민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홍낙민 루카는 1780년에 진사가 되었습니다. 서울로 이주한 뒤 이승훈, 정약용 등과 어울려 1784년과 1785년 무렵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습니다.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회의 일들을 잘 보아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습니다. 벼슬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신해박해(1791년) 때 정조 임금의 명에 따라 겉으로는 신앙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뒤에는 기도생활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을묘박해(1795년) 때 임금이 다시 배교를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신해박해 때 했던 대로밖에 있을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하였지만,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온전히 지켰습니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하였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자 처음에는 배교하는 말을 하였으나 곧 배교한 것을 뉘우치며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저는 천주교가 옳은 줄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데 억지로 그르다고 한 것은 혹 살 길이 있을까 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중형을 받고 장차 죽을 것인데, 하필 옳은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며 천주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고백하자, 관리는 “천주학을 사학이라고 말하라.”고 닦달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이제 당연히 죽어야 할 처지에 어찌 감히 예수님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2월 26일 서울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한 홍낙민의 아들 재영

 

이때 이곳을 지나던 한덕운 토마스는 길가에서 거적으로 덮여있던 그의 시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이에게서 홍낙민의 시신이라는 말을 듣자, 평소에 그를 아꼈던 그는 매우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하였습니다. 이 박해에 홍낙민의 아들 재영 프로타시오는 배교하였습니다. 한덕운은 그가 배교하였다는 말을 듣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습니다.

 

홍재영은 배교한 결과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갔습니다. 한동안 냉담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습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사면령을 내리자, 관장은 배교하도록 회유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름으로써 이전에 잃은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피신해 다니는 신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광주관장은 그에게 한 번 문초를 하고 나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때 읍내의 주민들 300-400명이 나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괴로워하며 울부짖기까지 하였습니다.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순교자들이 그러했듯이 밀고하는 것도, 주님을 배반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형선고문에는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신자들을 숨겨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에 따라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 홍낙민과 아들 재영의 삶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었으나, 그들은 체념에 빠지지 않고, 절망하지 않았으며, 용기를 내어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지 청하였고, 그대로 살았으며, 순교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에 물들었다 해도 주님께 돌아가면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경향잡지, 2007년 8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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