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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19: 아리우스 이단과 제1차 니체아 공의회 - 니체아 신경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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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210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19) 아리우스 이단과 제1차 니체아 공의회 - “니체아 신경 채택한 최초의 공의회”

 

 

- 325년에 소집된 제1차 니체아공의회는 모든 공의회 중 최초의 공의회이다. 사진은 니체아의 소피아성당.

 

 

[터키=김상재 기자] 재작년 수천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터키 대지진의 진앙지 '이즈니크'.

 

호수변에 자리잡은 이즈니크는 주민 2만여명의 소읍에 불과하지만 로마·비잔틴 시대에는 꽤 이름난 도시 니체아였다. 로마시대에는 비타니아 속주의 주도였고 십자군 전쟁시에는 4차 십자군에 점령당한 비잔틴 제국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 안에서 니체아는 맨 첫번째 공의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325년에 소집된 제1차 니체아공의회는 모든 공의회 중 최초의 공의회이면서 모든 교의논쟁이 발생할 때마다 니체아신경이 정통성의 기준이 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

 

니체아공의회는 부활대축일의 날짜를 춘분이후 만월 다음 주일로 확정하고 성직자 생활, 교회구조, 공적 참회, 전례문제 등에 대하여 처음으로 세계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교회법적 규정을 공포했다. 뿐만아니라 니체아공의회 개최의 빌미가 됐던 아리우스 사상을 단죄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한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의를 정립했다.

 

2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의 주무대는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로 옮겨지게 됐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이 헬레니즘과 혼합되면서 체험적이고 성서적이었던 신앙 표현방법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점점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아리우스 역시 플라톤주의의 원리를 자기 신학의 논거로 삼았다.

 

아리우스 사상의 핵심은 첫째 신성을 지닌 하느님이 되려면 창조되지 않는 분이어야 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로고스는 성부로부터 낳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따라서 로고스는 성부의 첫 번째 피조물이며 다른 피조물처럼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자가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공적을 보시고 입양시켰기 때문으로 신성과 어떤 유사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는 성부는 성자를 창조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성자를 통해 창조된 첫 번째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하던 아리우스가 318년부터 이러한 사상을 설교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전통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러한 설교를 철회하도록 한 교도권의 권고에 아리우스가 응하지 않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는 318년에 이집트지역 주교회의를 열어 100여명의 주교들과 함께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단죄했다. 아리우스는 이 결정에 굴하지 않고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 등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팔레스티나와 아시아 등지의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교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계속 전했다. 그 결과 아리우스 논쟁은 점차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해 동방으로 확산됐다.

 

안티오키아 학파를 중심으로 한 아리우스 지지자들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의 결정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교회회의를 개최해 아리우스의 명예를 회복시키자 323년부터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서로 집회를 개최하여 상대방을 이단으로 비방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분열로 내몰았고 사회적으로도 큰 혼란이 야기됐다.

 

 

공의회 소집과 그 이후

 

324년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막 통일된 제국이 종교적 문제로 인한 지역적 대립으로 분열될 위협을 느낀 나머지 하나의 교리로 통일 시킬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황제는 교리내용보다는 제국의 안녕만을 바랐으므로 이 논쟁의 신학적 의미를 몰랐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 논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들을 비티니아 지방의 니체아에 소집해 325년 5월 20일에 공의회를 개최했다.

 

다행히 세계 최초의 공의회에 참석한 300여명의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인 성자의 신성, 육화와 구원의 신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니체아 신경을 채택했다. 교부들은 니체아 신경에서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homousios), 동일한 천주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교회의 일치를 기대했으나 논쟁이 수그러지지 않자 공의회의 결정보다 제국의 평화유지에 목표를 둔 콘스탄티누스는 정책을 수시로 변경한다.

 

화해를 염두에 둔 황제는 328년에 아리우스와 추종자들의 추방명령을 취소시키고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다시 복직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아리우스 사상을 반대하고 철저한 니체아 신경 신봉자로 신앙과 관련해 황제를 수시로 거부해 온 아타나시오를 알렉산데르 주교의 후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황제의 기대와는 달리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복직을 거부해 귀양을 가게 된다. 아타나시오는 이때부터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주교직에서 쫓겨나고 1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정통신앙을 고수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도 아리우스 사상은 황제의 교회 정책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 취임후 제국내 모든 사람들이 니체아 신경을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종식되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교의 결정으로써 공식마감 됐다.

 

신앙문제에 있어 국가와 교회는 이단을 극복하려는 동일한 관심사를 가졌지만 그 동기는 서로 달랐다. 교회는 신앙의 교의적 명확성이, 황제에게는 사회 안정과 국가의 일치가 더 중요했다. 따라서 신학적 대립은 동시에 빈번하게 정치적 세력 투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투쟁은 교회의 정신적 힘을 길러 주었고 교의의 확정과 유능한 인재를 길러 내기도 했지만 사도들과 순교자 중심의 교회가 영주급 주교들 중심의 봉건주의적 교회로 가는 계기가 되기도 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0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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