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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23: 성 비오 10세 교황 -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 위해 반지까지 뽑아준 흙수저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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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4 ㅣ No.699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23. 성 비오 10세 교황(제257대, 1835.6.2~1914.8.20)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 위해 반지까지 뽑아준 ‘흙수저 교황’

 

 

4세기 만에 나온 성인 교황인 비오 10세는 본당신부 시절에도, 주교로 살 때도, 교황으로 살면서도 가난한 형제들을 우선적으로 돌봤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페이스북에서 밝힌 성 비오 10세 교황

 

“오늘은 겸손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저와 연결된 분이시지요. (비오 5세 교황 시성 이후) 수세기가 지난 뒤, 성인으로 공표된 비오 10세 교황(1903~1914년 재위)입니다. 그분은 파도바(Padova)교구의 작은 도시 톰볼로(Tombolo)본당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목을 시작했는데, 글쎄 그 지역은 가축거래시장이 형성된 곳으로, 욕설과 불경스런 언행이 난무하던 곳이었답니다. 주민들은 이 젊은 신부님께 자신들의 문맹을 탄식하였나 봐요. 신부님은 즉시 야학을 열어 그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고요. ‘신부님, 학비를 얼마 내야 합니까?’라고 사람들이 묻자, 신부님은, ‘전혀 학비는 안 받겠습니다! 다만 여러분께 부탁 하나 하지요. 더는 욕설하지 말기!’라고 하셨습니다.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시절, 기차에 오르실 땐 일등석에 오르시고 기차가 떠나면 삼등석으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한 번은 그러시다가 도착지 전에서 내리신 적도 있었답니다. 누구에게나 겸손했던 그분은 자신을 내세우지도, 과시하지도 않으셨던 분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지 두 달 만에 주일 오후에 바티칸 내 소나무 정원(Pigna)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랬겠죠. ‘당신은 원하면 하고 싶은 대로 당신 친지들에게 중요한 지위도 줄 수 있지 않나요?’라고요. 그랬더니 그분은 ‘아! 나의 동기간들은 이미 훌륭한 지위를 갖고 있어요. 나의 형님은 우체국 직원이고, 누나와 여동생들은 한 가정 안에서 이미 훌륭한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지요!’라고 하셨어요. 어느 날 그분의 조카인 바티스타 파롤린 신부가 삼촌 교황께 바티칸 안에서 일을 주십사 부탁하자, 삼촌은 그에게 자신의 본당 직무에 충실하라고 엄중히 말씀하셨답니다. 가난한 이에게 친절했던 그분은, 교회 종탑을 사들여야 하는 걸 포기한 자선 단체인 ‘자비의 몬테(Monte di piet)’에 자신의 금시계를 보냈으며, 전 교황님의 낡은 것들을 수선하여 입으셨습니다. 어느 날은 돈이 필요한 이들에게 교황 반지까지 뽑아주시니 그분은 반지 없는 교황이기도 했답니다.

 

성 비오 10세는 수려한 보석이 박힌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계셨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 목걸이가 모조 보석 십자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팔려나갔기에 바티칸신문사도, 누구도 그분이 가짜 보석 십자가를 목에 걸고 계셨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교회 역사 안에 그분과 같은 삶을 사셨던 많은 사제, 주교, 추기경, 그리고 교황들이 계십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분명 마태오복음 6,1-4의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계실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페이스북에서)

 

「성인 그리고 교황 : 비오 10세」에 수록된 어린 시절의 소년 사르토. 맨발로 비포장 도로를 14㎞를 걸어 학교에 다녔던 사르토는 신발이 닳을까봐 목에 걸고 다녔으며, 전 학년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던 총명하고 겸손한 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오른쪽 그림은 조랑말 타고 신자를 방문하는 만토바교구장 시절의 사르토 주교. 이 조랑말도 나중에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서 팔아 나눴다.

 

 

“저는 싼토가 아니라 사르토(재봉사)입니다”

 

쥬세페 멜키오레 사르토(Giuseppe Melchiorre Sarto), 비오 10세 교황! 내가 2013년 3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분이다. 1572년 성 비오 5세 교황 이후, 단 한 분도 성인 교황이 없다가 4세기가 지난 뒤 성인 교황이 된 좀 특이한 분이다. 왜 특이한 분인가? 사르토(Sarto)는 “저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한 베네토 지방의 시골 농부 출신으로, 요즘 말로 하자면 흙수저 교황이었다. 어부였던 교황 베드로 성인과 비견(比肩)할 교황이 아닐까 한다. ‘본당 신부’로 17년간 사목했고, 본당 어린이들에 대한 교리교육을 통해 될 수만 있으면 빨리 첫 영성체를 하도록 도왔다. 또 그 유명한 ‘비오 10세 교리문답’의 탄생은 아마도 욕설이 난무한 톰볼로본당의 문맹자들이 정신을 집중하는 데 문답식 교리가 효과적임을 알고 시도한 그의 교리교수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본당 사목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에 대한 사목 방문이었다. 어느 날, 사제관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누이 로사는 고기를 넣은 냄비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누님, 놀라지 마세요. 조금 전 아픈 아내와 4명의 어린 자식이 배를 곯는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냄비 채로 주었어요. 아, 우린 폴렌타와 치즈 한 조각이면 충분하잖아요?’라며 기쁨에 찬 얼굴로 누이에게 말했다. 검소한 사르토의 옷은 그의 누이들이 수선(교황이었을 때도)을 해주었다. 그의 성인 ‘사르토’(Sarto)는 ‘재봉사’란 뜻이었는데, 재밌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한 신자가 그의 성덕에 감화된 나머지, 어느 날, “오, 당신은 싼토(Santo, 성인)이십니다!”라고 하자 즉시 그는 “네, 저는 싼토가 아니라 사르토(Sarto, 재봉사)입니다”라고 유머러스하게 답해주었다고 한다.

 

또 1873년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본당 신자들에게 밤낮으로 고해성사를 주는 것도 모자라 밤에 시신을 매장하러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관에서 시신이 나오니 같이 가던 이들은 혼비백산해서 밭으로 도망가고, 사르토는 죽은 영혼을 보듬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묘지까지 다다랐다고 한다.

 

1884년 11월에 로마에서 레오 13세 교황으로부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만토바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다. 레오 13세는 늘 ‘사르토 몬시뇰은 롬바르디아의 주교들 중에 탁월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주교로 있던 만토바(Mantova)에서나 추기경으로 있던 베네치아(Venezia)에서 그는 늘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성직자였다. 레오 13세가 선종하고 로마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하여 곤돌라(베네치아 운하의 교통수단이던 배)에 오르자, 수많은 베네치아인들은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추기경님!” 하고 말하며 그를 로마에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전했다. 그 외침을 들은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살든지 죽든지 저는 돌아옵니다!”라고 답변하고 베네치아로 돌아올 왕복표를 샀지만, 그는 로마에 남게 됐고 제257대 교황, 비오 10세가 되었다.

 

교황으로서 에티켓 가운데 비오 10세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 중 하나는,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4년 재위)때부터 이어져 온 ‘교황의 혼밥’ 전통이었다. “저는 복음과 사도행전을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베드로 성인이 혼자 식사를 했다는 대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늘 두서너 명과 함께 식사했다고 한다.

 

 

‘1917년 교회법’ 탄생하는 데 크게 이바지

 

인간미 넘치는 관대함과 소작농 출신의 단순함을 지닌 그였지만, 교리의 엄격함과 국가에 대한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며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신앙과 과학과의 화해를 제안했으며, 양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 전통에 반하는 사상이 퍼지자 1907년에 회칙 「주님의 양떼의 사목」(Pascendi Dominici gregis)을 반포하고, 모더니즘을 ‘양의 탈을 쓴 늑대’로 표현하며 비판하였다. 또 교회 전례와 성음악에 활력을 불러 넣었고, 새로이 교회법전 개정판 편찬을 시도하였다. 1914년 8월 그가 선종한 뒤 3년이 지난 1917년 그의 후임이었던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서명으로 ‘1917년 교회법’이 탄생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로마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에게 사도적 강복을 줄 것을 두 번이나 긴급하게 요청하자 비오 10세는 “나는 저 끔찍한 재앙이 안 일어나게 제 생을 바칩니다. 나는 평화만을 축복합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한 뒤 1차 세계대전 발발 전날, 하느님의 집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1954년 5월 29일 성인 반열에 올랐다. 베네치아의 리에세(Riese)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겸손하게 자라난 그는, 자신의 생애 전체가 스승인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닮기를 원했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삶을 살았기에 ‘성인 사제’(Santo Sacerdote)로서, ‘성인 교황’(Santo Pontefice)으로서 베드로좌의 모든 교황의 모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그의 괄목할 만한 업적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레시피 : 베네타식 핀자(Pinza Veneta)

 

▲ 준비물: 남은 빵(식빵, 바게트 또는 치아바타) 200g, 밀가루(또는 폴렌타용 옥수수 가루) 100g, 우유 650㎖, 버터 60g, 사과 1개, 건포도 50g, 말린 무화과 80g, 호두 80g, 레몬 1개, 피노키(finocchi) 허브 적당량, 소금.

 

→ 잘게 손으로 자른 빵에 우유 300g을 넣어 적셔 놓는다. 밀가루에 남은 우유를 넣어 잘 저은 다음, 소금 한 꼬집과 녹인 버터를 적셔 놓은 빵에 같이 넣어 살살 나무주걱으로 버무려 놓는다.

→ 반죽에 소다로 잘 닦은 레몬 껍질(노란 부분만)을 갈아 넣고, 다진 호두와 작게 썰어 말린 무화과, 깍둑 썰어 레몬즙에 버무린 사과, 럼주에 담갔다가 부드러워진 건포도, 허브를 넣고 살살 버무린다.

→ 사각의 오븐 용기에 버터를 바르고 반죽을 펼쳐 채운 다음, 170도에서 한 시간 굽는다. 식힌 후 사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 간식이나 후식으로 먹는다.

 

▲ 모니카 팁

 

핀자(Pinza)도 가난한 시절에 먹던 이탈리아 북부의 돌체(Dolce) 중 하나이다. 재료는 그야말로 농부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이었는데, 그때의 전통 핀자보다는 현재의 핀자 재료들이 더 풍부하게 첨가하여 그 맛의 풍미를 더 끌어 올린 듯하다. 잣, 그라파(Grappa), 레드 와인, 딸기 등 입맛에 맞는 것들을 넣기 시작하였다. 핀자는 주로 성탄 시기, 특히 주님 공현 대축일(Epifania), 1월 6일에 먹는 이탈리아 북부의 전통 돌체이다. 같은 이름의 볼로냐식 핀자, 트리에스테식 핀자도 유명하나 다른 형태의 핀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1월 13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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