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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진후 비오와 김종한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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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557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김진후 비오와 김종한 안드레아

 

 

7월 5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1925년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한국교회 순교자 79위가 시복되었고, 1949년 11월,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시며 7월 5일을 축일로 반포하셨습니다. 교황청에서 있은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석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님은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승리와 영광의 날이다. 하느님께 찬미! …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로 시복 소칙서의 낭독이 있었다. 이어 (순교자들의) 영광이 드러났다. 그것은 감탄이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승리와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이십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신앙을 받아들여 관직을 버린 김진후

 

순교자 김진후 비오는 김종한 안드레아 순교자의 부친이며,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조부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입니다. 1739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난 그는 50세가 되었을 무렵 자식들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관직생활을 하던 그는 처음에는 신앙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관직을 버리고 신자의 본분을 열심히 지켜나갔습니다.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었고, 이후에도 1801년까지 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05년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때 관장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는 등 신자답게 행동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기에 사형판결을 받지 못한 채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관리들과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생활의 고통을 참아낸 그는 1814년 10월 20일 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감옥을 덕을 배우는 학교로 만든 김종한

 

김진후 비오의 셋째 아들인 김종한 안드레아는 부친의 신앙생활과 순교를 직접 체험하면서 신앙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홍주를 거쳐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있는 우련전(雨蓮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연꽃이 물에 떠있는 듯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17년 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면서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어서, 말과 더불어 기도와 모범적인 생활로 많은 이를 입교시켰습니다.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저녁에는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습니다.

 

1815년(을해) 4월 23일 체포되어 안동으로, 다시 대구로 이송되었습니다. 대구 감영에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습니다. 2년 남짓 감옥에서 지내면서 신자들(김화춘 야고보,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이시임 안나,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과 함께 감옥을 덕을 배우는 학교로 여기고, 모든 말과 행동에 규율이 잘 잡힌 가족처럼 모범적이고 화목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서로 열심히 인내하자고 격려하고, 고난의 도가니 속에서 덕을 단련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형에게 이런 서한을 보냈습니다. “육신은 몹시 약하므로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은 불쌍한 죄인은 순교의 영광을 누릴 만한 공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다만 여러 교우들의 도의심만 믿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빌고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 소원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 만일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교우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나는 지금 신앙을 위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처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아직 내 죄 때문에 아리따운 순교의 문턱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당합니다. 우리는 역경이거나 순경이거나 모든 것을 천주의 섭리로 생각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는 대구에서 1816년 11월 1일 열 번가량의 칼을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런 형벌을 아주 조용히 당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의 순교는 자식에게로 이어져, 딸 성 김 데레사는 기해박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얼마 전 경북 영양군과 봉화군 경계에 있는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마을을 찾아가면서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길을 헤매는 순례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해 준 경찰, 마을 위치를 가르쳐준 미잠 마을에서 아름답게 사시는 분, 바쁜 일손을 뒤로하고 교우촌에 대한 유래와 교우촌 복원을 위한 교회의 노력들을 말씀해 주신 동네 어르신 등, 마치 순교자께서 안배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교우촌과 남아있는 신자들은 없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믿고 사셨던 김종한 순교자의 얼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였습니다.

 

[경향잡지, 2007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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