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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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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556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

 

 

지난 호에 이어 머루산 교우촌에 살던 순교자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공동체의 삶과 죽음을 본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장애인이었던 김시우 알렉시오와 과부였던 이시임 안나를 똑같은 형제자매로 여겼고, 이들의 넘치는 사랑과 형제애로 머루산 교우촌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교회서적을 필사한 김시우 알렉시오

 

김시우 알렉시오는 1782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성품이 착하고 어진 그는 안타깝게도 반신불수인 탓에 가난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신자들의 애긍시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그는 고향을 떠나 신자들이 살고 있는 진보의 머루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815년(을해) 초 포졸들이 교우촌을 급습하여 신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포졸들 앞에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포졸들에게 “나도 신자인데, 몸이 이렇게 반신불수라고 잡아가지 않는군요.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포졸들이 “네 소원이 그렇다면 같이 가자.” 하자, 기쁜 낯으로 따라갔습니다. 이렇게 그는 순교를 자원하였습니다.

 

경주로, 대구로 끌려간 그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교회서적을 감추어둔 곳에 대해서는 단지 그 지명만을 이야기할 뿐이고, 누구에게 서적을 나누어주었는지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진술하지 않았습니다”(“일성록”).

 

대구에서 문초를 받을 때에 감사가 “네가 예수를 흠숭한다고 하는데, 그 예수라는 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매에 죽은 사람이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이 어째서 그리 훌륭하다는 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기 백성의 물질적 구원밖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중국 하(夏) 나라 우(禹) 임금이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만방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하고 교리를 전하면서 입교를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화가 나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턱을 부수는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구에 이송되어 온 지 두 달 만에 굶주림과 형벌로 생긴 상처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1815년 5월 또는 6월경이었습니다. 그때 나이 33세였습니다.

 

그는 열심과 재능, 관원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변호한 용기, 특히 동정신분으로 신자들 사이에서 귀한 존재가 되어,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약한 여성이지만 씩씩한 용기를 보여준 이시임 안나

 

이시임 안나는 충남 덕산 높은뫼(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오빠인 이성지 요한은 1827년(정해) 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습니다.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결심한 그녀는 부모와 고향을 떠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동정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이때 뱃사공 박씨가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뱃사공은 마음을 바꿔 그녀와 강제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비통하지만 체념하고 같이 살면서, 아들 종악이를 낳았습니다. 몇 해 안 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아들을 혼자 길러야 했습니다.

 

과부가 된 뒤에도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신자들이 모여 사는 머루산 교우촌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15년(을해)에 체포당하였습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녀는 안동으로, 대구로 끌려가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신앙을 용감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들 종악이 자신의 품속에서 죽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듬해인 1816년 11월 1일 순교 직전 사형장에서 대구 감사는 김종한 안드레아 등 남교우 5명을 처형한 뒤, 그녀와 구성열 바르바라에게 “너희 여자들이야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저들의 죄에 비하면 너희의 죄는 가볍다. 아직 때가 늦지 않았으니, 한마디만 하면 놓아주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교리를 모르실 수가 있으십니까. 관장님 말씀대로 하면, 남자들은 천상의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해야 하지만 여자들은 천주를 공경하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 말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법대로만 다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어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순교의 칼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이 34세였습니다. 그녀의 순교기록을 남긴 이는 “이로 미루어볼 때 이 여인이 비록 약한 여성이었으면서도 아주 씩씩한 용기를 보여주었고,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천주의 영광을 찬란하게 증언할 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서적을 필사하며 깊은 교리지식을 가졌던 김시우 알렉시오 순교자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순교를 열망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죽는 고통을 당한 이시임 안나 순교자는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영원한 행복을 갈망하였습니다. 두 분이 순교를 갈망한 것은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준 머루산 공동체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경향잡지, 2007년 6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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