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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강이 시몬과 김사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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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555

[한국교회 124위 순교자전] 김강이 시몬과 김사건 안드레아

 

 

머루산 교우촌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에 있습니다. 머루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입니다. 영양성당 이희정 신부님의 배려로 석보공소 전 회장이신 이병권 로베르토 형제님께서 동행하셨습니다. 포산리 마을회관에 차를 세운 뒤 이른 봄에 내린 눈이 살짝 덮인 산길을 40분간 걸어갔습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싶은데, 그렇기에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고 살았을 순교자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3대가 순교자가 된 김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난 김강이 시몬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재산을 포기하고 하인들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동생 김창귀 타대오와 함께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을 사목방문하신 주문모 신부님께 성사를 받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자로 지목되어 포졸들의 수사망을 피해 다니다가, 아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아내가 석방된 뒤 그는 등짐장사를 하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도 틈나는 대로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등짐장사는 신앙생활을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의 깊은 산속인 머루산으로 들어가 그가 입교시킨 몇 명의 신자 가족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열성으로 이웃에서도 입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여러 곳을 이사 다니다가 강원도 울진(현재는 경상북도)에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그는 옛 하인의 밀고로 동생과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안동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강제로 빼앗긴 자신의 재물을 되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돌려받은 재물을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그는 5월 동생과 함께 강원도의 수부인 원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앞서 갇혀있던 6-7명의 신자를 만났습니다. 이들과 동생은 고문과 심문을 받던 도중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심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강원감사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한 뒤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임금은 사형집행을 재가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형벌로 인한 상처가 아주 심한데다가 옥중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재가가 내려졌음에도 사형집행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며칠 안 되어 그가 원하던 참수형을 못 받고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옥에 갇힌 지 8개월이 되는 1815년 11월 5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은 아버지의 모범이 아들에게, 아들의 모범이 손자에게 그대로 이어졌는데, 김강이의 둘째 아들 양범(빈첸시오, 64세)이 그의 아들 선행(필립보)과 함께 1867년 9월 수원포교에게 잡혀 수원에서 순교한 것입니다(“치명일기” 375). 이리하여 3대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옥살이 12년, 포졸들을 감동시킨 김사건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는 김강이의 조카입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부친 김창귀 타대오와 함께 머루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었으나, 그는 감옥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습니다. 부친이 유배를 간 뒤에 그는 경상도로 이주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하면서 당시의 일을 후회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며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습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체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오히려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초를 받으면서도 관장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와 십계명을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관장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리뼈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는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습니다.

 

며칠 뒤 그는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감옥에 있던 신자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사형집행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이 쓰던 물건과 옷을 모두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해 4월 14일, 그는 동료인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은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영양성당에서는 머루산 교우촌의 토지 일부를 확보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14처를 만드는 등 성지개발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 머루산 교우촌에 살았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신자 가정 모두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김강이 시몬의 가족을 닮아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순교자들이 살았던 마을을 찾는 것만으로도 신앙에 큰 위로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경향잡지, 2007년 5월호, 여진천 폰시아노(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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