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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순교자성월 순교자 현양 특별강론: 삶의 현장에서 위주치명 정신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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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9-16 ㅣ No.552

순교자 성월 '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 지상 중계 제1강 - 최창무 대주교(광주대교구장)


삶의 현장에서 '위주치명(爲主致命)' 정신 실천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최창화 몬시뇰)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4일부터 18일까지 '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을 마련했다. 본보는 특별히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해 '피어나라 순교자들의 꽃이여'를 주제로 한 이번 특강 요지를 연재, 순교자들의 거룩한 신앙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가위 신문 휴간으로 2,3회는 9월 28일자에 동시 연재). 4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강의로 시작된 순교자 성월 특강은 11일 박정일 주교, 18일 유흥식 주교(각 오후 2시 명동대성당) 등 3회에 걸쳐 이어진다.

 

 

순교의 개념과 의미

 

9월은 한국 교회가 정한 순교자 성월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은 9월에 가장 많이 순교하셨고, 특히 9월 20일은 한국순교성인 대축일이다.

 

'순교'라는 단어는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많이 접해 익숙해져 있지만 순교자 성월을 맞아 좀 더 깊고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순교의 개념을 되짚어 보겠다. 순교란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성경에 보면 어원적으로 '순교'(Martyrdom)는 법정용어다. 즉 증언, 증거, 증인의 의미가 들어 있고 구세사 안에서 순교자로 발전했다.

 

이에 비해 '치명'(致命)은 우리 선조들 순교의 피가 묻은 말이다. '위주치명'(爲主致命), 즉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헌신의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 순교자들이 기쁘게 가난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위주치명의 삶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주치명은 한국 순교사에 들어 있는 옛말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할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뿌리는 바로 선조들이 행한 위주치명 안에 담겨 있다. 수많은 순교 중 가장 위대한 순교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다. 하느님 뜻을 밝혀주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삶, 곧 영원의 시작이다.

 

순교의 죽음 안에는 부활, 새 생명, 새 삶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면 그에 상응해서 새 생명이 솟아나온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이 구원된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순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의인과 죄인의 대결로 점철돼 있다. 초기 교회에서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악과 맞서 싸운 순교자들이 있었다.

 

첫 번째 순교자라 할 수 있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또 사도로서 첫 번째 순교자인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서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들의 순교가 교회에 불러일으킨 영향을 살펴볼 때 순교가 우리 신앙의 결정적 씨앗이 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순교자 현양 특별 강론' 참석자들이 4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강의를 듣고 있다. [백영민 기자]

 

 

역사 속 예언자들의 몫은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다 죽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죽는 것은 바로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을 수행하는 것과 통한다. 그 무엇도 하느님과 바꿀 수 없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능력을 다 바쳐 주님을 공경하고 사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순교자와 위주치명의 완성자이자 대표자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5-7).

 

예수님 부활 이후 다시 순교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안에 이뤄진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사도 5,28) 하며 추궁하는 말에 사도 베드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 29)하셨다. 즉 위주치명의 삶을 그의 행위로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 예언자와 사도들의 삶을 통해 볼 때 결국 성경은 구세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순교의 역사를 가리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순교는 땀의 순교, '백색순교', '녹색순교'

 

가톨릭교회는 역사에서 살아 움직이며 살아 완성되는 교회다. 신앙인이란 살아 있는 신자들을 통해 순교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것을 의미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신앙의 자유로 과거 신앙의 선조들처럼 피 흘림의 순교를 요구 받지는 않는다. 종교의 오해와 몰이해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현대는 악인과 의인의 대결로 이뤄졌던 과거의 순교 대신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백색순교와 녹색순교가 필요하다. 백색순교란 피 흘림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순교를 뜻했다. 박해시대 이후 동정녀들이나 광야의 수도자들의 삶을 가리키는'증거자'들의 삶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순교 현장은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어야 하겠고, 우리가 날마다 머무는 자리가 곧 순교 현장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위주치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백색순교와 녹색순교의 기회를 기억하자.

 

순교자 성월을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 우리 모두 삶의 현장, 순교의 현장에 기쁘게 동참해야 할 것이다.

 

[평화신문, 2008년 9월 14일, 정리=이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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