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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54: 요동 차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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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05 ㅣ No.2106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4) 요동 차구에서


스승 베르뇌 신부 도와 중국 신자에게 교리 가르치고 성사 베풀어

 

 

눈의 성모 성당으로 불린 차구성당은 조선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고,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했다. 사진은 의화단에 의해 소실되기 전 차구성당의 모습. 차기진 박사 제공.

 

 

주민들의 습격 받은 베르뇌 신부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5월 프랑스 함선을 타고 백령도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자신들을 마중 나온 신자들과 만나지 못하고 상해로 되돌아왔다. 둘은 조선에 있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작정 상해에 머물 수 없어서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모색하기 위해 바로 프랑스 함선을 타고 요동 차구(溝)로 갔다. 차구에는 그해 만주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베르뇌 신부는 1845년 7월 15일 조선 입국을 위해 마카오에 머물던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추천됐다. 그러나 베르뇌 신부는 만주 선교사로서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이를 거절했었다.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뇌 신부와 최 신부는 개인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 1840년 9월 통킹 선교사로 임명돼 마카오에 도착한 베르뇌 신부는 지금의 북베트남인 통킹 임지로 떠나기 전 동안 조선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었다. 그는 1841년 1월 마카오를 떠나 통킹 푹낙에서 선교를 하다 곧바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베르뇌 신부는 자신의 사형 집행이 지연되고 때마침 프랑스 함대가 통킹으로 와 선교사 석방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하자 5명의 선교사와 함께 2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로 귀국하지 않고 마카오에서 다시 만주로 와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베르뇌 신부는 1844년 3월부터 1848년까지 요동 개주(蓋州), 라가점(羅家店), 양관(陽關)과 사령(沙嶺)에서 사목했다. 그가 1849년 양관에서 차구로 선교 사목지를 옮긴 까닭은 1848년 3월 4일 자신과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가 양관본당 사제관에서 주민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죽은 이와 어린아이의 눈을 뽑아가고, 죽기 직전인 아이를 소금에 절여뒀다가 아편을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베롤 주교와 베르뇌 신부는 상해까지 피신했다. 베롤 주교는 1849년 4월 상해 주재 몽티니 프랑스 총영사에게 양관 주민들이 1844년 황포조약을 위반하고 성당을 공격한 데 대해 중국 당국에 항의하고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조처해 달라고 요청한 후, 베르뇌 신부를 양관이 아닌 차구에서 사목하도록 했다.

 

 

조선 선교의 교두보 ‘눈의 성모 성당’

 

오늘날 중국 요녕성 장하시(莊河市) 용화산진(蓉花山鎭)에 자리한 차구 눈의 성모 성당은 초대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가 1840년대 초에 건립했다. 눈의 성모 성당은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 경관과 성당 첨탑이 어우러져 교우들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교우촌 일대에 눈이 쌓이면 그 풍광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성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불에 타 소실됐다.

 

차구성당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웠기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요동을 ‘제2의 조선’으로 여기고, 차구를 그 중심부로 인지했다. 최양업 신부를 비롯해 조선 선교사 브르트니에르ㆍ위앵ㆍ도리ㆍ볼리외 신부가 요동에 도착해 머물다 조선에 입국했다. 또 차구는 박해의 피신지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블랑(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이 됨)ㆍ리샤르ㆍ마르티노 신부는 박해가 잦아질 때까지 차구에서 머물렀다. 리델ㆍ칼레 신부도 박해를 피해 조선에서 차구로 피신해 조선 재입국을 모색했다. 아울러 차구는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가 있던 곳이다. 조선 교회 장상이던 리델 신부는 제2차 조선대목구 성직자회의(시노드)를 1868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부터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까지 18일 동안 차구성당에서 개최했다. 또 리델 신부는 1869년 1월 말(또는 2월 초) 베롤 주교와 협의해 차구본당의 사목 관할권(재치권)을 만주대목구에서 조선대목구로 이관받았다. 차구본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조선 선교사들이 차구를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는 차구 ‘눈의 성모 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베르뇌 신부의 지시에 따라 사실상 보좌 생활을 했다. 최 신부는 1849년 6월 21일 베르뇌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에 관한 클레멘스 11세 교황 헌장 「그날부터」(「Ex illa die」, 1715년 3월 19일 반포)와 베네딕토 14세 교황 칙서 「그 특별한」(「Ex quo singulari」, 1742년 7월 11일 반포)의 내용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문을 작성해 서명하고 선서한 후 사목을 시작했다.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행동은 당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공자 숭배나 조상 제사와 같은 중국 의례에 관한 교황청의 금지령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중국과 조선에 다섯 종류의 우상 숭배가 퍼져 있다고 주시했다. 불교와 유교, 도교, 조상 제사와 민간신앙, 무속이 그것이다. 선교사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조상 제사’였다. 이 문제는 이미 몇 세기 동안 ‘중국 전례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라자로회 등 선교단체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행된 바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조상 제사가 조선과 중국 선교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아시아인들을 ‘미개인’으로 인식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과 중국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무시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인 신자 사목한 첫 번째 조선 사제

 

최 신부는 차구에서 베르뇌 신부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배하는 성무를 수행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중국 땅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사목한 첫 번째 조선인 사제이며 선교사가 되었다. 1854년 8월 5일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12월 27일 주교품을 받은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 시절뿐 아니라 첫 보좌 시절 때부터 선종할 때까지 지켜보고 함께한 사제이다. 신학교 교수로, 동료 사목자로 평생을 함께했던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소중한 일로는 훌륭한 자질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라고 칭송했다.(베르뇌 주교가 1861년 9월 4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편,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에게 다시 백령도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할 것을 그 해 11월에 지시했다. 입국 시기는 1851년 음력 3월 중이라고 잠정적으로 알려 왔다. 그 시기에 중국 어선을 구해 백령도로 오면 두 신부를 마중할 교우들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게 변문 국경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다.

 

“조선인 (최양업) 신부를 입국시켜 보려고 저는 중국 국경으로 (신자를) 보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을 이끄시어 그를 자기 조국에 돌아오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조선에 돌아오려고 노력을 많이 해 왔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2월 30일 조선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1849년 12월 말 최양업 신부는 변문에서 자신의 입국을 도울 조선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메스트르 신부도 함께 변문으로 가길 원했다.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할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어떻든지 무슨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두 신부가 변문에 도착하니 조선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할 방법을 조선 신자들과 궁리했다. 하지만 서양인인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1846년 병오박해와 프랑스 함선 2척의 고군산도 좌초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국경 경비가 한층 강화됐기 때문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스승 메스트르 신부를 홀로 두고 어쩔 수 없이 조선 신자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7월 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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