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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55: 입국해 바로 한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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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2 ㅣ No.2109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5) 입국해 바로 한양으로


드디어 조선 땅 밟은 최양업 신부, 성사 베풀고 사목 시작

 

 

최양업은 압록강을 건너 입국해 바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때 귀국길을 도운 안내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셋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방제의 형 최형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 TV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왼쪽)와 안내자가 한양으로 향하는 모습.

 

 

귀국 길을 안내한 밀사

 

제3대 조선대목국장 페레올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올해 초에 최 토마스 신부가 무사히 입국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다블뤼 신부도 최양업 신부가 1850년 1월께 입국해 자신에게 와서 병자성사를 주었다고 가족에게 전했다.(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부모에게 보낸 편지 참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밝힌 최양업 신부의 귀국 일자는 국경을 통과해 조선에 들어온 날짜가 아니라 한양에 도착한 시기를 적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 박사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연행사 일행이 귀국할 때를 틈타 최양업 신부의 입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가정해 그 시기를 전반적으로 ‘1849년 12월 하순께’로 추정한다. 1849년은 철종이 즉위한 해로, 조정에서 같은 해 시호를 주청할 주청사를 7월에 파견했는데 이들이 시호를 받아 귀국하면서 의주를 통과한 때가 그해 12월 하순이었다. 철종이 귀국한 사신 일행을 만난 것이 1850년 1월 13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의주 변문에서 한양까지 보름이 걸렸으니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 변문을 통과한 후 다음 해 1월 15일 이전에 한양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청사 일행의 일정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최양업 신부를 귀국시킨 이는 누구일까? 최 신부의 귀국 길을 안내한 밀사가 누구였는지 알려주고 있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 신부의 편지에도 단지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신 밀사들”이라고만 나온다.(같은 편지) 페레올 주교 역시 “토마스 신부를 입국시켜 보려고 저는 중국 국경으로 파발꾼들과 말을 보낼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1849년 11월 28일 자, 12월 30일 자 편지 참조)

 

최양업 신부의 귀국을 도운 안내인으로 추정되는 이는 3명으로 압축된다. 첫 번째 인물은 1843년 3월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를 변문에서 만났던 김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북경을 다녀와 변문 일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특히 그는 1836년 1월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이광렬(요한)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입국시켰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관악산 밑 삼성산으로 이장할 때 참여하는 등 교회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

 

두 번째 인물은 최양업 신부의 유학 동기인 최방제의 형 최형(베드로)이다. 그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키는 데 참여했다. 그는 또 앵베르 주교로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돼 사제로 양성되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도와 회장으로 전교와 교회 출판 사업에 헌신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은 최양업 신부가 고군산도에 표류했을 때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배를 끌고 신치도에 갔던 최양업 신부의 이종사촌 형이다.

 

자기 사람만을 기용했던 페레올 주교의 성품을 고려하면, 이들 셋 중 아마도 최형이 최양업 신부의 귀국을 도운 밀사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김 프란치스코는 1843년 이후 교회 내에 뚜렷한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앵베르 주교의 사람으로 분류돼 페레올 주교가 기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은 변문 지리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배제됐을 것이다.

 

1849년 12월 하순께 귀국한 최양업 신부가 조선 교회에서 사목자로서 첫 번째로 한 일은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는 것이었다. 사진은 손골성지로 이곳은 최 신부가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최양업 신부가 첫 성사를 베푼 곳

 

여하튼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하순 혹한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밟은 후 한달음에 한양에 도착했다. 최 신부는 한양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그는 중병을 앓고 있던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최양업 신부가 조선 교회에서 사목자로서 첫 번째로 한 일이었다. 다블뤼 신부는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 수리치골 교우촌에서 박해가 잦아질 때까지 은신하다 중병에 걸렸다. 1847년 봄부터 그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음식”이라고 할 만큼 한식이 전혀 맞지 않아 위장병을 심하게 앓았다. 또 풍토병이 그를 괴롭혔다. 그로 인해 오른쪽 무릎의 힘줄들이 늘어나서 자주 탈골이 됐다.

 

병자성사와 최양업과의 만남은 다블뤼 신부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됐다. 다블뤼 신부는 병자성사를 받은 후 최 신부에게 프랑스에 계신 부모님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다블뤼 신부는 부모의 편지조차 읽을 힘이 없을 만큼 위독했었다. 최양업의 방문과 병자성사는 분명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이후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고 기력을 되찾았다. 이 일을 인연으로 최양업과 다블뤼 두 신부는 죽음을 늘 곁에 두고도 하느님을 향한 형제애를 쌓아갔다.

 

“제가 생사를 오가며 투병하고 있는 동안에 중국에서 공부한 조선인 사제 최 토마스 신부님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국경을 넘는 날 날씨가 매우 춥고 매서운 추위와 바람이 불도록 하셨어요. 미리 보낸 밀사들이 한밤중에 국경 초소에 이르러, 세관원들이 추위를 핑계 대고 관문을 닫게 했어요. 세관원들이 그들을 수색하는 동안 두 번째 밀사들이 토마스 신부를 모시고 국경에 도착했고, 관문이 닫혀있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조용히 도망쳐 국경을 넘어왔답니다. 그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국경을 넘은 뒤로는 더 이상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자 보세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요. 그토록 기다리고 그토록 소원했던, 그리고 너무나 필요한 그 원군이 우리에게 왔어요. 그는 입국하자마자 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 곁으로 달려와 종부성사를 주었습니다. 헛소리를 해대며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상태는 지나갔으나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읽지 못해 몹시 안타까웠던 부모님의 편지 한두 통을 그에게 읽어달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10일 또는 15일이 지난 뒤에 비로소 그 편지들을 제가 직접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하루에 두세 통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기간 이후로 훌륭한 토마스 신부님은 여전히 사목 순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전년도 편지에서 부모님께 언급했듯이 제가 방문하지 못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교우촌들을 전부 사목 순방을 했습니다.”(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말 조선에서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가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조선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사를 집전한 곳은 어디일까? 페레올 주교가 ‘매우 외진 곳’이라 표현했던 이곳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는 이는 없다. 일반적으로 교회사학계에선 이곳이 ‘손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당시 다블뤼 신부의 주요 사목 활동지가 경기 용인 손골 교우촌이었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지 않던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1849년 후반부터 소신학생 양성 일을 맡아 했다. 다블뤼 신부는 40살가량의 황석두(루카)와 이 바울리노 등을 선발해 자신의 거처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다블뤼 신부는 1850년 10월 배티에 방 두 개짜리 집 한 채를 매입했다. 그는 이때부터 1854년 배론으로 옮기기 전까지 해마다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는 배티에서, 5월부터 9월까지는 배티에서 약 200리(대략 80㎞) 떨어진 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했다. 학자들은 다블뤼 신부가 말한 배티에서 200리 떨어진 여름 신학교 터를 ‘손골’일 것으로 추정한다.

 

손골은 1839년 기해박해 전후로 형성된 교우촌으로 서울뿐 아니라 지방과도 연락이 원활하며 비교적 안정된 곳이어서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우리 말과 풍습을 익히는 등 중요한 선교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7월 1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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