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는데…(황사영 알렉시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7 ㅣ No.2111

[돌아보고 헤아리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는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 「백서(帛書)」의 실물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자!”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 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서, 황사영 알렉시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2020년 2월, 바티칸 민속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관리 책임자인 M 신부의 안내를 받아 고문서 연구실에 들어가 특수 제작된 상자 속에 담겨 있는 황사영 「백서」를 보았습니다. 200년이 넘은 문서인데도 방금 붓글씨로 쓴 것처럼 보관 상태가 좋아 보였습니다. 황사영의 혼이 깃들어 있는 백서를 한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M 신부가 저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백서의 모퉁이만 살짝 만져 보라고 특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와 이백만 요셉, 실로 219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뜨거운 전율이 감돌았습니다.

 

황사영 사건은 제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제 머리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쟁점적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3년간(2018~2020년) 근무하면서 조선의 알렉시오를 특별히 묵상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1801년) 때 조선 정부의 폭정을 막아달라고 청나라와 프랑스에 구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써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는 절체절명의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보낸 자위적 차원의 SOS(긴급구조요청)였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반역 행위를 했다며 대역 죄인으로 몰아 극형(거열형[車裂刑])에 처했습니다. 황사영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국가전복을 꾀한 국사범인가, 목숨을 신앙과 바꾼 순교자인가? 황사영이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나? 정치 권력이었나, 신앙의 자유였나? 그는 왜 임금님이 보장해 준 출세의 길을 버리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를 형극의 길을 택했을까? 그 힘은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 인물(사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의 진보에 따라 평가의 잣대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황사영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마에서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주시했습니다. 황사영이 왜 「백서」를 써야 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019년 홍콩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그것은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베이징의 중국 정부가 발끈했습니다. 홍콩의 반정부 시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9년 9월 AP통신은 특별한 사진 한 장을 보도했습니다. 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홍콩 시위대가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미국 의회에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트럼프 대통령님, 홍콩을 해방시켜 주세요.”라고 쓴 깃발도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자, 세계 최강 미국에 SOS를 보낸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민족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실정법에 따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황사영 사건과 같은 구도 아닌가요? 황사영은 혈혈단신 심산유곡(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에서 ‘1인 저항’을 하였고, 홍콩 시위대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단 저항’을 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홍콩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평가에서 한국 일반사와 한국 교회사는 심각한 불일치 상태에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황사영에 대해 수구적 평가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덩달아 일반인들도 황사영을 반역 죄인으로 보려는 경향이 여전합니다. 역사의식의 빈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황사영을 순교자로 인정하고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황사영 재평가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군사 독재에 항거하다 실정법(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했습니다. 대학생 · 시민운동가 · 성직자 · 정치인 등이 투옥당하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군사 독재가 사라지고 민주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들은 복권되고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내란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재평가는? 황사영이 조선 시대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200여 년 전 조선 시대의 잣대로 황사영을 재평가해야 할까요, 아니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잣대로 재평가해야 할까요. 황사영은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정권을 찬탈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의 재평가 문제는 단순히 가톨릭이라는 특정 종교 차원에서만 논의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뿌리를 둔 핵심적인 기본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역사의 법정이 열려 황사영에 대한 복권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2년 7월호, 이백만 요셉(전 주교황청 대사)]



48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