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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3장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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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2 ㅣ No.1873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3장,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하기

 

 

열린 세상, 닫힌 세상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서른 해쯤 됩니다. 그간 우리 사회의 변화는 괄목상대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외국 문물이라고 해 봐야 AFKN 방송이나 미군 부대 물건들, 일본에서 보따리장수들이 들여온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미국산 콘플레이크로 아침 요기를 하고, 점심에는 프랑스산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를 즐기며 저녁에 호주산 고기로 식사를 하는 범세계적 밥상을 보게 되었지요. 휴가에 고향집을 찾아 일손을 돕던 풍경은 옛이야기이고, 전 세계 좋다는 곳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 관광객을 드물지 않게 봅니다. 이런 면만 보면 세상이 점점 더 열리고 있는 듯한데 실상 그 저변에는 ‘그들만의 리그’, ‘패거리’를 꾸리면서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들이 점점 높아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예를 볼까요.

 

첫째,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일어난 큰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공공 공간이 사유화되어 출입이 제한된 주거단지’를 말하는데, 단지 입구에 게이트와 이를 통제하는 게이트 컨트롤 시스템, 그리고 단지 주변을 두르는 담장에 의해 폐쇄적인 공간을 이룹니다. 이 커뮤니티 내부에는 주거 건물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함께 배치되어서 비슷한 사회계급/계층의 사람들끼리 살 수 있게 하지요. 미국에서 현대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최초로 등장한 이후 중남미같이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큰 곳, 또 인도나 호주처럼 다른 문화와 인종, 계급에 대해 경계심이 있는 곳까지 날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시에도 각 아파트 단지마다 벽을 치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으며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을 쉽게 봅니다. 골목길에서 이른바 ‘있는 집’ 아이들, ‘없는 집’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함께 노는 것은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유달리 학군 따지는 세태는 학교마저도 어울림의 공간이 아니라 끼리 끼리만 모이는 자리가 되었음을 방증합니다.

 

둘째,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먼저 사다리를 걸친 이가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에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 그러니까 어떤 분야에서 성과를 낸 사람이 뒤따라 올 경쟁자를 방해하고 견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국가 차원에서도 이런 일은 쉽게 볼 수 있지요. 한편 지대 추구(rent-seeking) 행위는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는 방법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 않는 활동(위키백과)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장벽을 만들어서 자기 몫을 늘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지대 추구 행위가 사다리 걷어차기와 결합하면 부의 원활한 순환을 가로막고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만 ‘노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사회적 낭비를 초래합니다.

 

이런 현상의 핵심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세대 간 갈등이나 주택 문제 같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널린 재개발 현장들을 보십시오. 공사장마다 극단적인 말로 뒤범벅된 현수막을 걸고 돈이라도 받아 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공사로 인한 불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양보하며 합리적으로 해결할지 고심하지 않고, 남들 다 뜯어가는 돈을 나만 안 받으면 손해라는 피해의식, 나중에 그렇게 올라간 비용 때문에 젊은 세대와 가난한 이들의 주거 확보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몰염치함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이렇게 지금 당장 내 것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세상을 갈라놓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닫힌 공간으로 몰아갑니다.

 

 

참다운 관계와 충실한 유대 위에 세워진 삶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회 회칙「모든 형제들」의 제3장에서 인간이 왜 홀로 살 수 없는지, 왜 타인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지 먼저 설명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을 통해서 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살아가고 발전하며 충만에 이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87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거인의 정원』(원제:The Selfish Giant)에 나오는 ‘저만 알던 거인’처럼 많은 사람이 담벼락 속에 갇힌 삶 속에 만족을 누리려고 합니다만, 그 끝은 분명합니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내 자식 출세하게 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다음, 노년에 이르러 전화 한 통 없는 자녀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분들을 더러 봅니다. 능력도 많고 재산도 많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조금도 내어놓지 못하는 영적 초라함도 자주 봅니다. 사람은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존재의 성장을 찾는 일종의 ‘탈아(脫我, ekstasis)’의 법칙이 있습니다.”(88항)

 

그런 면에서 교황님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정체성을 고수하는 사회 집단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성장하는 오늘날 세상(109항)을 진단하면서 개인주의를 우려하고 패거리에 안주하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개인주의는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더욱 평등하게 더욱 형제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단지 개인들의 이익이 모인다 해서 온 인류 가족을 위한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105항) 강자든 약자든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나를 위협하고 내 패거리의 이득을 갈취하는 적이 아닙니다.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를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뒤처진 이들이나 힘없는 이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돕고자 투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09항) 그리하여 “사회가 시장의 자유와 효율성을 우선 기준으로 삼아 운영된다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으며 형제애는 그저 또 다른 막연한 이상으로만 남을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09항) 교회는 이런 경향에 맞서서 열린 세상을 지향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마태 23,8)라고 일깨워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을 받은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은 누구를 위해서 뛰고 있습니까?

 

소설『빙점』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맥박이 전혀 안 움직이는 것이다. 죽으면 숨도 멈추고 심장의 맥박도 멈춘다. 그러나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일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폐결핵과 척추골양, 직장암에 파킨슨병까지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뭇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향년 77세로 귀천한 아야코 여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뛰지 않는 심장은 죽은 심장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내 심장은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가?” - 누구나 스스로에게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월간빛, 2022년 7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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