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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스페인 알바 데 토르메스: 성녀 대 데레사의 마지막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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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632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스페인 알바 데 토르메스


성녀 대 데레사의 마지막 흔적, 알바 데 토르메스를 찾아

 

 

성녀 대 데레사의 탄생지인 아빌라를 뒤로하고 서북쪽 방향으로 한 시간 반가량 달리니 산등성이에 우뚝 솟은 살라망카가 눈에 들어왔다. 13세기 초 건립된 이 나라 최고(最古)의 대학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 외곽을 수심이 깊지 않은 한 줄기 강이 감아 흐른 후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알바 데 토르메스(Alba de Tormes)로 이어진다. 이 물줄기가 16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악자(惡者) 소설인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배경이 되었던 토르메스 강이다.

 

450년 전 가난한 소년 라사리요는 그가 섬긴 여러 주인을 통해 16세기 스페인의 귀족과 교회의 위선과 탐욕을 해학과 풍자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양식을 숨겨놓고 혼자만 배불리 먹는 신부, 사기행각으로 면죄부를 파는 수도승, 하녀와 불륜에 빠지는 고위성직자에 이르기까지…. 대 데레사가 생존하던 시절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두려워한 익명의 작가가 쓴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왜 그녀가 힘겨운 개혁의 가시밭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

 

살라망카 입구에서 낡고 좁은 지방도로로 바꿔 타고 반시간쯤 더 가다보면 드디어 인구 5천 명의 호젓한 소읍인 알바 데 토르메스에 닿게 된다. 지명에서 스페인의 권문세가였던 알바 공작가문의 영지였음을 알 수 있는 이 마을 어귀 강가에 대 데레사가 1571년 지은 성모영보 수도원이 있다.

 

성녀는 1582년 가을의 어느 석양 무렵 이곳에 도착한다. 그해 여름,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운 부르고스의 수도원을 떠나 메디나 델 캄포와 바야돌릿을 거쳐 고향인 아빌라로 향하던 중 갑자기 공작부인을 만날 일이 생겨 일정을 변경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성녀는 여독까지 겹쳐 쓰러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1562년 마흔일곱의 늦은 나이로 아빌라의 강생 수도원을 나와 20년 동안 척박하고 거친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수도원 신축사업과 개혁운동에 매진해 온 바였다. 도착하자마자 수도원에 몸져누운 그녀는 이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예감한다. 고향에서 임종을 맞을 수 없는 아쉬움이 컸으나, 그나마 알바 데 토르메스에는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들과 여동생인 후아나 데 아우마다가 시집와서 살고 있었기에 조금은 심정적인 위안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현재까지 맨발의 가르멜회에서 운영하는 성모영보 수도원 내부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 데레사의 생애 마지막 숨결이 묻어있는 조그마한 방(4월호 62쪽 사진)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10월 3일 병자성사를 받으며 성녀는 “주님, 마침내 그토록 소망하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주님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채 십자가를 보듬어 안고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의식을 잃고 10월 4일 밤 9시에 선종하게 된다.

 

대 데레사는 이튿날 수도원에 안장되는데 우연히도 그날은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게 되는 첫날이었다. 성녀의 축일이 10월 15일인 이유는 두 달력의 편차에 따라 10월 4일의 다음날이 바로 15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아무튼 민간전승에 따르면, 데레사가 선종하던 그 시각 토르메스 강의 물결이 마치 그녀의 마지막 심장박동처럼 숨 가쁘게 일렁였으며 임종 후에는 온 마을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흩어진 성녀의 유해

 

성녀가 선종한 방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박물관이 꾸며져 있다. 여러 성물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유리벽 안에 놓여있는 성녀의 왼쪽 팔뼈와 심장이다. 순례객에게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느끼게 할 법도 하지만 이는 알고 보면 세인들의 불신과 다툼 그리고 기복신앙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대 데레사가 돌아가신 뒤 그녀의 탄생지인 아빌라와 임종을 맞은 알바 데 토르메스 사이에 서로 유해를 모시겠다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관을 열게 되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고 일부에서는 이 기적이 교회의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돌았던 모양이다. 결국 성녀의 유해에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신에 칼을 들이대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몰래 아빌라로 빼돌려졌던 성녀의 유해는 알바 공작이 로마에까지 탄원하여 결국 알바 데 토르메스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복잡한 과정에서 성녀의 오른발과 턱의 일부는 로마에, 왼쪽 손은 리스본에, 왼쪽 눈과 오른손은 론다에, 그리고 손가락과 살 조각들은 아빌라를 비롯한 스페인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현재 알바 데 토르메스의 성모영보 수도원 내 중앙제대에 모셔진 유해는 나머지 부분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인들의 소동과 광기가 빚은 끔찍한 ‘카니발리즘’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수도원 오른쪽으로는 맨발의 가르멜 수사회에서 운영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성당’이 있다. 1695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년)에게 봉헌된 첫 성전으로서 의미가 있다. 성모영보 수도원과 십자가의 성 요한 성당을 끼고 마련된 조그만 광장 한 편에는 수도회가 운영하는 또 다른 박물관이 있으며 부속 성물가게에 들어가면 데레사와 관련된 성물들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알바 데 토르메스를 돌아보는 데에 두어 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순례란 눈보다는 마음의 볼거리를 우선하는 여정이므로 이 마을을 방문할 이유와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토르메스 강을 건너 다시 살라망카로 향하는 비좁은 국도로 접어드니 석양이 지고 있었다. 4백여 년 전 어느 날의 이 시간, 지친 몸을 이끌고 저 지평선 너머 마을로 사라지던 대 데레사의 마지막 뒷모습과 귀족의 딸로 태어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감수한 그녀의 생애를 되새기다 보면 어느덧 순례자의 눈가도 노을처럼 붉게 물들기 쉽다.

 

* 전용갑 요셉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4-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 캠퍼스 스페인어 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글 전용갑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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