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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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가톨릭 신학35: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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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14 ㅣ No.4362

[가톨릭 신학35]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140회 나오는데, 바오로 서간에 가장 많고 요한복음에도 적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 그분께 구원 받았다는 특권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생명은 하느님과 나누는 코이노니아(친교)를 뜻하고,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코이노니아를 ‘충만한 생명’이라 표현합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궁극적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은 무슨 말일까요? 흔히 영원은 시간 이전 혹은 시간 이후의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랍 문화에서 영원성은 무시간성, 즉 시간의 피안 혹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것, 그리고 끝없는 시간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신학적으로는 영원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원은 시간을 포함하고 또한 완성한다고 말합니다. 즉, 영원은 단순히 시간 이후도 이전도 아니며, 시간과 구분되어 있되 시간을 포함하고 동시에 초월합니다. 따라서 죽음 다음에야 영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우리의 시간은 이미 영원 속에 있으며, 마지막에는 영원으로 온전히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이 논리가 가능한 것은 하느님이 시간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시간 속에 들어와 현존하시며 시간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끊임없이 돌보시고 완성으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과 친교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마지막 날 그분을 뵙게 될 때 충만에 도달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지금 여기’ 시작되었으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생명이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이기 때문에, 생명은 금덩어리처럼 고정된 무엇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1코린 13,12-13) 바오로 사도는 사랑만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에 따르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2코린 5,7)가며,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합니다.(로마 8,25) 그렇다면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을 얼굴을 맞대고 볼텐데 왜 여전히 믿음과 희망이 필요한 걸까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영원한 차이가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남김없이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마주본다 하더라도 믿음과 희망의 공간은 여전히 남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생명을 누리는 일은 영원 안에서 영원히 새로울 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영원히 새롭게 알며 영원히 새롭게 희망하고 영원히 새롭게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2023년 11월 12일(가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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