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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56: 조선 철종과 세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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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9 ㅣ No.2113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6) 조선 철종과 세계 정세


19세기 중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해 일어날까 노심초사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던 1849년 강화 도령 이원범이 철종 임금으로 즉위했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철종을 둘러싼 안동 김씨 집안의 정치 파벌로 박해가 일어나지 않을까 예의주시했다. 철종 어진.

 

 

철종을 둘러싼 권력 다툼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당시 조선 교회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옛것과 새것이 충돌하는 격랑의 시기였다.

 

먼저, 조선은 1849년 헌종이 죽고,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농사짓고 나무베던 19세 ‘강화 도령’ 이원범이 임금으로 즉위했다. 바로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할아버지가 은언군 이인이다. 은언군은 장남 상계군 이담이 1786년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자 강화도로 유배됐다. 이후 역적의 집이라 해서 폐궁이 된 양제궁에서 은언군의 부인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곧 이담의 부인 신 마리아가 세례를 받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철종 이원범이 비록 은언군과 그의 첩 전산군 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지만, 하느님의 종 송 마리아가 그의 할머니, 신 마리아가 그의 큰어머니가 된다. 은언군 역시 1801년 사사(賜死)되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왕족의 신분을 회복했다. 선대 헌종의 숙부뻘로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 왕족 중 헌종과 가장 가까운 촌수여서 왕위에 오르게 된 철종은 헌종에 이어 계속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력의 실권 없는 꼭두각시 임금이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철종의 즉위로 박해의 바람이 다시 불지 않을까 걱정했다. “저희는 지금은 평화로운 편입니다. 다시 말해 박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떤 하찮은 일로도 박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던 22세의 젊은 국왕이 방탕한 생활로 극도로 쇠약해져서 얼마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조선을 다스려 온 장자계의 마지막 후예였던 그는 자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후계자로 18세(오기임)의 어느 젊은 왕자가 뽑혔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해 전부터 유배지에서 무료하게, 거지와 비슷한 처지로 살고 있었습니다. 몹시 비참하게 살아온 그가 갑자기 최고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이 세상을 돌보시지만, 이 일이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새 국왕의 할아버지는 천주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1801년 박해 때에 죽임을 당했고, 중국 황제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무고되었습니다. 현재의 국왕은 자기 조부의 명예를 회복할 목적으로 북경에 사신단을 보낼 예정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협상 중에 십중팔구 종교 문제도 거론이 될 텐데 유리한 결론이 날지 불리한 결론이 날지 몰라 뭐라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선왕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왕의 측근이었던 사람들은 이제 그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정승이었던 사람은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사약을 마셨습니다. 여러 명의 다른 고관은 유배지로 보내졌습니다. 우리 교회의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에 저희는 별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의 싸움이 끝나면 그들이 저희에게 선전포고를 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저희는 맞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1월 28일 한양에서 홍콩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감록」에 요동치는 민심

 

페레올 주교와 달리 다블뤼 신부는 철종의 즉위에 따른 국내 정세의 변동에 좀더 예의주시했다. “새 왕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나 천주교인들에게 어떤 사람일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습니다. 왕좌에 오르기 전에는 정치와는 완전히 낯선 생활을 해왔던 그는 늙은 대왕대비가 그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말하니,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오는 이유는 양반층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파벌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후 이어지는 일들을 두고 보면서 그 형세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는 현재 아주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많은 불만의 감정들이 만들어낸 큰 동요의 기운이 퍼져 있습니다. 내란이 일어난다는 소문, 외국과의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조만간 예언이 이루어질 거라는 말들도 떠돕니다.”(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말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다블뤼 신부는 같은 편지에서 「정감록」으로 인해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 책은 조선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에 관한 예언서입니다. 조선인들은 그 책에 담긴 내용을 전부 믿고 있으며, 지나간 일들을 보더라도 그 책의 예언들이 늘 맞았다고 주장합니다.…어떤 이들은 이 왕국의 멸망과 서양 종교의 안착에 대한 예언도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말들이 여러 해 전부터 나타나는 서양 배들의 출몰과 때를 같이하면서 백성들 사이에 심리적인 불안과 상당한 두려움을 심어 넣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조선 사회가 「정감록」에 근거해 진인 정도령이 이씨 조선 왕조를 뒤엎고 계룡에 도읍을 정해 새 나라를 세운다는 민간신앙이 유행할 때 청나라에서는 광서성 농촌 출신 홍수전(洪秀全, 홍슈취안)이 지극히 평화로운 하늘나라 곧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설파하면서 자신이 ‘천왕’이라고 선언했다. 과거(科擧)에 세 차례나 낙방한 홍수전은 그리스도교 서적을 탐독한 후 자신도 하느님의 아들로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유교와 조상 사당을 공공연히 파괴하면서 중국에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태평천국을 세우기 위해 만주족을 박멸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1850년 청나라 황제 도광제가 사망하고 함풍제가 즉위하자 그는 2만여 명의 태평군을 이끌고 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교황청

 

교황청도 이탈리아 해방과 통일 전쟁에 중립 태도를 보이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을 맞고 있었다.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인들로부터 ‘조국의 적’으로 비난받고,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파국의 불씨는 1848년 11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인 주세페 마치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황령의 펠레그리노 로시 총리를 암살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교황 근위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교황을 바티칸궁에 감금했다. 이후 마치니는 1849년 2월 9일 로마 공화국을 선포했다.

 

바티칸에 감금된 비오 9세 교황은 변장하고 로마를 빠져나온 후 시칠리아 왕국 가에타로 피신했다가 1850년 4월 12일 프랑스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교황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맺을 때까지 교황청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티칸의 포로’로 살아야만 했다.

 

프랑스도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시대가 열렸다. 1848년 11월 선포된 새 헌법에 따라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철회하고 국민 투표를 통해 제2 제정을 수립해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다. 공화정 시대가 다시 열리면서 프랑스 사회는 빠르게 세속화됐고, 정교분리 경향을 드러냈다.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을 표방했던 펠리시테 드 라므네는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절대왕정과 특정 이익집단을 대변한다고 비난하면서 교회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는 교회의 자유는 교회를 국가와 완전히 분리하는 데서 시작한다며 정교분리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승리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 교회는 왕정체제를 선호하는 반공화 정치 성향과 정교분리를 거부하는 반근대주의적 사고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 교회를 둘러싼 이와 같은 격동의 시기에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복음 선포’라는 넓고 깊은 신앙의 바다에 전인격을 기꺼이 던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7월 1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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