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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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공동체 갈등 상담: 시끄러운 본당 시끄러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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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26 ㅣ No.157

[공동체 갈등 상담] 시끄러운 본당 시끄러운 마음


사도 바오로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왜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에페소 신자들이 그만큼 말도 많고 서로 헐뜯으면서 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에페소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동안 본당 사목을 하면서 느낀 점은 아주 시끄러운 본당이 있는가 하면 덜 시끄러운 본당이 있을지언정 조용한 본당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첫째, 우울한 신자들이 많을 때 그렇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사람은 누구나 장점만큼이나 결점과 단점을 가지고 삽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일종의 착시 현상 즉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장점이 너무나 커보여서 단점이나 결점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마음이 병들었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그런 착각이나 환상에 빠지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단점을 크게 보고 적나라하게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늘 속이 편치 않고, 그 상태에서 주저리주저리 말하다보니 좋지 않은 소문의 진원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본당이 조용해지려면 우울한 신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 내면의 수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리학자인 삭티 거웨인은 “우리는 거의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마음속으로 내면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스스로에게 분주히 말을 걸면서 감정은 물론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수다가 즐거운 것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안에서 부정적인 수다를 떨어대는 존재를 일컬어 ‘내면의 투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내면의 투덜이’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우선 우리가 과거에 연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성당이 오래되고 유동인구가 별로 없는 지역의 성당에 가보면 처음에는 서로 정이 깊다는 착각이 듭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매여서 눈치 보며 산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칭찬은커녕 은근히 헐뜯기 일쑤에, 그것도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집안 족보까지 들먹입니다. 그래서 잡다한 소문이 성당 안에서 끊임없이 퍼집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내면의 투덜이가 만든 부작용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아주 고집이 센데다 우리가 약해진 순간에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의욕 대신에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히게 하거나 기분을 망가뜨리거나 늘 불평을 늘어놓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공동체가 늘 갈등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면의 투덜이’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예전에는 무조건 때려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없애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긴 심리적 부작용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예민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독기를 품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리학자인 호르스트 코넨은 우선 내면의 투덜이가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식을 벗어난 자학적 행위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도록 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듯이 ‘투덜이’, ‘우울이’, ‘삐짐이’ 등으로 그 성격에 따라 다르게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을 들이밀면서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어내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때에는 ‘그렇게 해서 얻을게 뭐냐’ 등의 말로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으름장을 놓아야 합니다. ‘조용히 해라! 나 건드리지 마라!’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만!!”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나가!!”하고 야단을 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거칠게 다루거나 억지로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모 속을 썩이는 아이처럼 평생 데리고 살아야할 내 안의 문제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너무나 싫고 미울 때에는 왜 그 문제아가 나에게 붙어있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내면의 투덜이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선 겸손하기 어려울 것이고, 영신수련을 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고, 부모님 속 썩인 죄에 대한 보속의 기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불편한 대로 데리고 살아야겠지요.

지난 1년간 본당이 시끄러운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내 탓이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생전에 ‘내 탓이오’ 운동을 장려하고 확산시키려 무척 노력하셨습니다. 교회건 사회건 사람들이 지나치게 남의 탓을 하는 것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킬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고 예방책이자 치유책으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이셨지요. 이 운동은 갈등이 심하고 시끄러운 본당을 화목하고 조용한 본당으로 만들기 위한,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해야 할 영신수련 방법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길잡이, 2012년 12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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