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2 ㅣ No.628

[경향 돋보기]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춘천교구에서 추진하기 시작한 한국전쟁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을 계기로 한국전쟁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묻혀있던 한국전쟁 순교자들에 대해 이제라도 본격적인 조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교회 안에 깊게 흐르고 있는 순교의 신앙은 ‘제2의 박해기요 순교자들의 시대’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한국전쟁 시기에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폭력과 살인이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전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이 보여준 선택과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가르침과 모범이 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전쟁 순교자에 대한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 시복시성을 위해서는 여전히 더 많은 조사와 목격자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제한적으로나마 당시 상황을 기록한 몇몇 책과 자료들을 통해 당시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죽음의 행진을 직접 겪은 파리 외방전교회 구인덕(셀레스텡 코요스) 신부가 쓴 “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나의 북한 포로기”와 최인호의 장편소설 “영혼의 새”에 인용되는 가르멜 수녀회의 마리 마들렌 수녀가 쓴 “귀양의 애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엘 으제니 수녀가 쓴 “한 수녀가 겪은 3년간의 북한 포로기”, 북한 지역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미사가 봉헌되었던 사리원성당 보좌 진덕표 신부에 대한 증언을 담은 “북한 교회의 마지막 종” 등을 통해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랑은 함께 있음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이들은 대부분 피난을 갈 수 있음에도 자신의 사목구를 지키느라,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하느라, 목자를 보호하고자 남아있는 가운데 죽음과 고초를 겪게 되었다. 각 교구에서는 본당신부들이 사목구를 지키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많은 사목자들이 자신의 사목구를 지키다가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고통과 위험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있게 하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어 지게 한다.

 

사리원성당 진덕표 신부는 끝까지 신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셔 거두고, 남은 신자들을 피난시키려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전기고문과 갖은 고초를 당하고 사망하였다.

 

교황사절 방 브르느 주교는 서울에 있던 외국인들이 철수할 때 함께 철수할 것을 여러 번 권고받았지만 “착한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며 거절하고 남아있다가 체포되었다. 또한 심문을 하는 가운데 교황사절임이 드러나 북한군이 외교관과 동등한 대우를 하겠다고 하는데도 다른 신부들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이를 거절하고 죽음의 행진을 택했다.

 

 

고통을 받아들임

 

북한군에 체포된 포로들이 북쪽 지역의 여러 수용소를 돌며 그들의 주검으로 이동 경로에 표적을 남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죽음의 행진’에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여름 간단한 조사만 받을 거라며 체포되었기 때문에 단벌 옷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포로생활은 시작되었다. 한겨울 맨발로 산길을 걷기도 하고 좁쌀죽으로 연명하며 극도의 배고픔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걷다가 만난 민가에서 좁은 방 안에 몇십 명씩 끼어 잠을 잤으며, 이가 득실거려도 기운이 없어 잡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함께 걷던 이들이 하루에도 여러 명씩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극도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려운 때조차도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아픈 이들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이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갔다.

 

방 브르느 주교는 폐렴과 각기병, 이질로 위중한 가운데서도 늘 활기와 기쁨에 넘쳤으며,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하느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특전은 바로 죽기 전에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오르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 수녀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며 고집스레 남아있다가 죽음의 행진 길에 오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원장 베아트릭스 수녀는 계속되는 행진으로 기진맥진하여 도저히 걸을 수 없게 되자 간수들에게 “더 이상은 못 가겠어요. 원하거든 나를 죽이세요.”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평소 좋아하던 “양선하시고 너그러우신 어머니 마리아여!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나를 보호하소서! 임종 때에 나를 받아들이소서!”라는 기도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총살당하였다.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들은 이 고통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고백했다. 피와 땀을 흘리게 하는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봉헌물임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용서와 화해

 

죽음의 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글들 어디서도 불평이나 원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 수녀가 겪은 3년간의 북한 포로기” 후기에서 으제니 수녀는 “…모든 사건을 신앙의 빛으로 보는 수녀로서 우리는 북한 땅에서 보낸 3년간의 포로 생활을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또 감사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또한 죽음의 행진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위해 ‘지상에는 십자가가, 천국에는 기쁨이, 사랑은 어디에나’를 다시 외친다.”고 고백하였다.

 

직접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구인덕 신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에서 사목을 하였는데, 전쟁이 한참 지나고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통일에 대해 묻자 “어찌됐든 그들도 우리의 형제이니 먼저 그들에게 형제애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북한 형제들을 무시해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토록 모진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용기와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목숨을 바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참조)는 주님의 역설적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도 있지만, 가난과 질병, 가정불화 등 오늘날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통도 각자의 처지에서는 이들과 다르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각자의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참혹한 전쟁 속에서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삶이 그 답을 주는 듯하다. 사랑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고통이 은총임을,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 죽음의 행진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남쪽 지역에 있던 외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은 체포되어 일단 서울로 집결하였다가 평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이후 만포, 고산, 초산, 중강진에서 하창리에 이르기까지 북쪽 지역을 돌며 고난의 행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북쪽 지역에 한국전쟁 이전부터 ‘옥사독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덕원과 함흥 대목구의 성직자 ? 수도자들도 북행을 시작하여 만포와 관문리를 거쳐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돌아와 억류되었다. 1950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된 이 두 가지의 고난스런 이동 과정을 ‘죽음의 행진’이라 일컫는다. 굶주림과 추위로, 또 기력이 다한 이들에게 무리한 행진을 강요하여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경향잡지, 2007년 9월호, 이준혜 데레사(경향잡지 기자)]



49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