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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도시 스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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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4 ㅣ No.1524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도시 스코페

 

 

- 1963년 대지진의 참담함을 표현해 놓은 조형물. 가슴을 도려내고 자궁을 들어낸 이 조각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형상화했다.


발칸의 시월, 급속히 추워졌다. 게다가 비는 내리고 날은 어두웠다. 버스에서 내리니 맞은편 건물의 시계가 1963년 대지진이 일어났던 새벽 다섯 시께에 멎어있었다. 이 지진으로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Skopje)의 거의 모든 건물이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온전한 것은 터키식 돌다리와 칼레 성 정도뿐이었다고 한다.

비 내리는 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 낯익은 ‘여인의 향기’가 다가왔다! 인도 콜카타의 수녀로 기억되는 그녀, 2003년 시복된 마더 데레사였다. 그녀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가 서로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녀가 태어나던 당시 스코페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아직 두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마더 데레사가 특유의 구부정한 모습으로 서있는 기념관이 얼마 전에 세워졌지만, 1910년 알바니아인 부모에게서 그녀가 태어났던 자취는 없다. 세례를 받았던 ‘예수성심성당’ 터에 마케도니아 정부가 세운 기념관일 뿐이다.


- 비 내리는 스코페 중심가를 지나다 만난 마더 데레사 조각상. 그녀가 여기서 태어났다.


작은 건물 밖에는 마더 데레사의 환한 웃음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작은 독재자’로 불렸던 그녀. 그녀에게는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의 ‘그 순간’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품에 안겨 죽는 순간, 이 세상은 분명 절망의 늪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만 눈앞에 있는 존재, 그에게 온 힘을 다했다. 분명히 마더 데레사의 얼굴은 쭈글쭈글 주름투성이인데 마치 노년의 오드리 헵번과도 같은 느낌이다. 마치 청춘이 없었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주름이 많고 구부정한 사람처럼 떠오르는데 그 모습이 어찌하여 그리도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아-름-다-울-까!

 

마케도니아 정교인과 모슬렘(이슬람교도)이 각각 65%와 35%를 차지하는 마케도니아에서 가톨릭교회의 수도자인 마더 데레사는 어떤 의미일까? 기념관을 나와 거리 끝에 마더 데레사의 집터를 가리키는 작은 돌판 하나가 다시금 그녀를 기억하게 했다. 그녀는 말했다.

“혈통으로 보자면 나는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국적으로는 인도인이며 신앙으로는 가톨릭 수녀지요. 소명으로는 온 세상에 속하며 제 마음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오백 년이 넘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마케도니아는 유고 연방이 생겼다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1991년 독립국가의 첫걸음을 뗐다. 세계를 호령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태어난 마케도니아지만 지금은 발칸의 많은 나라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신생국가이다. 더욱이 다른 나라들과 갈등의 불씨도 꺼지지 않은 상태다.

- 바르다르 강을 지나는 터키식 돌다리 끝에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 그들의 제자인 클레멘스 성인과 나움 성인의 조각이 서있다.


불가리아 민족에게 마케도니아는 최초의 불가리아 정교회 수립과 중세 불가리아 제국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세르비아 민족에게는 코소보와 더불어 중요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리스와의 관계가 첨예한데 국명과 국기 문제로 불편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얽히고설킨 발칸의 역사에서 마케도니아의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 스코페는 어떻게든 존재감을 일구려고 ‘스코페 2014’라는 연구과제에 돌입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신고전주의 또는 바로크 양식의 정부청사, 국립극장, 미술관 등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났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조각상과 조형물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데, 스코페를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당황스럽다거나 낯설고 우스꽝스럽다고들 표현한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그렇게 급조되는 도시의 풍광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마케도니아 광장에도 어김없이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다. 그리고 바르다르 강에 놓인 ‘터키식 돌다리’ 끝에도 네 사람의 상이 서있었다. 그들은 키릴 문자를 만든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 그리고 그들의 직제자인 클레멘스 성인과 나움 성인이었다. 다리를 건너 여전히 이슬람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비로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펼쳐졌다.

동방시장에서 칼레 요새로 올라가는 길에 마케도니아 정교회 성당인 스베티스파스가 있었다. 작은 아치문을 지나 들어선 마당에 석관 한 기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성당 안에 기념관까지 있다는 그 관의 주인은 마케도니아의 독립투사인 고체 델 체프(1872-1903년)로, 마케도니아 광장의 돌다리 앞에 서있는 두 개의 동상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독립투사의 기념관과 무덤이 성당 마당에 있는 발칸 마케도니아, 정교회가 국민의 삶과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가까이 존재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 오래된 정교회 성당 스베티스파스. 마당에 있는 석관의 주인은 마케도니아의 독립투사 고체 델 체프다.


작은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이 교회가 지어지던 당시에는 이슬람 사원보다 높은 건물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가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곧 비모슬렘에 대해 정해놓은 강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은 피점령지에서 수도원이나 교회, 사원 등을 세울 수 없었고, 교회를 고칠 수도 없었다.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수도원과 교회를 개방해야 했고, 모슬렘에 대해서도 공손해야 했다. 포도주를 팔 수 없고 머리를 기를 수도 없다. 자신의 이름을 반지에 새겨 넣을 수 없고 폭이 넓은 허리띠를 해서는 안 되고….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 금칙이 비모슬렘에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곳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금칙과 제한과 족쇄들이 채워졌다. 그런 세상이 있었다.



성당을 나와 칼레 요새로가려는데 한 할아버지가 모퉁이를 지나고 계셨다. 구부정한 어깨 위로 또 하루의 무게가 얹힌 뒷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아서 조금 슬프고 한편으로는 조금 반가웠다. 모스크의 미나레트가 보이는 골목, ‘오래된 교회 앞을 지나는 저 할아버지는 모슬렘일까? 그리스도인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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