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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홍주의 순교자, 황일광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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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19 ㅣ No.626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홍주의 순교자, 황일광 시몬

 

 

아무나 대신해 줄 수 없고, 아무도 대신해서는 안 되는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남성 천직을 대표하는 백정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하인보다 더 낮게 취급받는 가장 비천한 이들이었습니다. 늘 고립된 곳에서 따로 살아야만 하고 아무도 그들을 일상생활의 교제에 끼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쉽게 잊혀갔고, 처연한 삶의 속내를 간직하고 세상 한 구석에서 그들만의 둥지를 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홍주에서 태어난 백정 황일광 시몬(1757-1801년)은 백정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바른 정신을 가졌고 선한 말을 하기를 즐겨했던 그는 1798년 홍산에 살던 이존창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난 뒤, 좀 더 자유롭게 신앙을 실천하려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열성으로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신자들은 그의 신분을 알면서도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형제처럼 양반 집안에까지 맞아들였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 대접을 받은 그는 자신에게 천국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주는 여기 바로 지상 천국이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가 보여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은 그에게 놀랄 만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더욱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그는 1800년 2월에 광주 분원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집 행랑채에 살면서 그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신자들의 찬사를 받았고 아름다운 행실로 열심인 교우들 사이에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해 10월경에는 서울로 가서 정동 여염집의 행랑살이를 하면서 나뭇짐을 지어주며 살았고, 겨울에는 정약종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1801년 봄 어느 날 그는 나무를 사러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에 그는 “사람들이 나를 ‘남원’ 관가에서 낙원인 ‘옥천’ 관가로 이송하였으니, 그 이상 더 큰 어떤 호의를 나에게 베풀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나무를 사는 대신에 옥에 들어갔다는 것을 빗대어 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내가 만 배 더한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하면서 보기 드문 강직함으로 기꺼이 감내하였습니다. 포도청에서 “저는 오랫동안 (사학에) 깊이 홀렸고, 정도라고 알고 있으니,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어찌 배반하고 저버릴 마음이 있겠습니까. 빨리 죽음을 당하는 것이 지극한 소원입니다.” 하였습니다. 묻는 말에 점잖고 거룩하고 자유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토록 천한 신분의 사람이 자신들이 배교의 대가로 주겠다는 목숨을 거절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잔혹한 방법으로 매질을 하여 다리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게 하려고 고향인 홍주로 보내졌습니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 짚으로 된 가마 위에서 이송되었는데, 끝까지 명랑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처와 아들이 마지막까지 그의 시중을 들려고 그를 따라오자 어떤 유혹도 받지 않으려고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1801년 12월 27일(음) 홍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형장은 홍주성 북문 밖,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 곧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입니다. 이 합수머리 지점은 원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둑을 쌓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그의 덕성과 예외적인 비천한 신분은 천주교 공동체 일부 내에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사람들은 존경과 찬사의 말로써 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성교회를 공경했던 아름다운 신앙 고백자로 통합니다. … 교황께서 그를 제단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한 지난 2008년 3월 15일 ‘홍주순교성지비’ 제막식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님은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마련한 홍주순교성지비 제막식을 통해 교구민들이 순교 성인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본받아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함께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였습니다.

 

황일광 순교자를 본받아 아름다운 신앙 고백자로 살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를 그가 체험한 천당 같은 살맛 나는 공동체가 되도록 만들었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09년 5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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