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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로댕의 '지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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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33

[성미술 이야기] 로댕의 ‘지옥문’

 

 

로댕의 ‘지옥문’ 1880~1917년. 전체 조감도. 6.35x4x0.85m. 로댕 박물관, 파리.

 

 

로댕은 「지옥문」 작업을 20년간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는다. 1880년 8월 16일 계약서를 작성하고, 1880년 10월에 2700프랑이 지급되었다. 같은 해 10월 20일, 아담과 하와를 따로 떼서 문 바깥쪽에 설치하는 조건으로 예산 증액을 요청했다. 이때 이미 높이 4.5m, 너비 3.5m의 거대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높이 6m에 너비 4m까지 커졌다.

 

「생각하는 사람」= 작품의 위쪽 벼랑에 걸터앉은 「생각하는 사람」. 시인 단테를 이렇게 표현했다.

 

「세 그림자」=「지옥문」 위에는 남자 셋이 모여 있다. 「세 그림자」 라고 불리는 이들은 고통스런 몸짓으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우골리노 백작」= 피사의 돌탑에 갇혀서 제 아들의 머리뼈를 뜯어먹고 있다.

 

「라벤나의 프란체스카」= 불구의 남편을 버리고 시동생 파올로와 욕정의 불꽃에 사로잡혀있다.

 

기베르티의 ‘천국문’ 로댕은 「지옥문」을 작업하면서 기베르티의 「천국문」 구성을 본떴다. 처음에는 저주받은 영혼들을 문짝의 열 구획에 나누려고 했다가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구성이 바뀌었다.

 

 

“고통의 도시로 가는 자, 나를 지나가라” 「지옥문」

 

이름부터 으스스하다. 이 청동문은 원래 파리에 신설하기로 했던 공예미술관의 입구에 붙이려고 주문 받은 작품이다. 작품 주제는 조각가가 알아서 결정하기로 했다. 1880년 로댕이 처음 작업을 맡았을 때는 문고리를 열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을 구상했을 텐데, 나중에 가서는 어쩐 일인지 영원히 잠긴 문이 되고 말았다.

 

로댕은 20년 동안이나 「지옥문」 구상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골머리를 썩이다가 공예미술관 신축 계획이 취소되자 결국 그 사이에 받았던 돈을 다 돌려주고 손을 털고 만다. 「지옥문」도 미완성 석고 모형으로 남아 있다가 1938년 조각가가 죽은 뒤에야 우여곡절 끝에 주조되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실적인 작품

 

「지옥문」을 주문받을 무렵 로댕은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신통치 않은 조각가에 불과했다. 파리 시청 2층의 북서쪽 벽감에 달랑베르의 초상조각을 깎아 넣기도 하지만, 장식 프로그램에 투입된 230명의 조각가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작품이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은 조형이 너무 사실적인데다 인체의 감당하기 어려운 격렬한 운동성이 그 당시 미술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달콤하고 경쾌한 조형에 길들여져 있던 파리의 평론가들이 거친 숨을 뿜어내는 로댕의 억센 조각작품들을 보고 거부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옥문」에서는 작품의 위쪽 벼랑에 걸터앉은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유명하다. 가파른 벼랑에 웅크리고 앉아서 생각에 잠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에다 근육이 우람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인 단테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단테는 이탈리아어로 쓴 그의 시집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에서 겪은 체험을 노래한 시인이다. 지옥을 둘러볼 때 베르길리우스와 동행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어쩐 일인지 혼자서 앉아 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그러니까 조각가 로댕의 「지옥문」은 옛 시인의 눈을 빌어서 그가 목격하고 기억하고 기록한 지옥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지옥문」 위에는 남자 셋이 모여 있다. 「세 그림자」 라고 불리는 이들은 고통스런 몸짓으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절망에 짓눌린 이들의 어깨와 경직된 팔이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원한 고통으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혼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단테 「신곡」 지옥편, 3곡 1~3절).

 

지옥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바람에 휩싸인다. 고통과 격정, 욕망과 탄식의 더운 바람 앞에서 우리의 영혼은 마른 빨래처럼 생기를 잃는다. 바람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온다. 피사의 돌탑에 갇혀서 제 아들의 머리뼈를 뜯어먹는 우골리노 백작, 불구의 남편을 버리고 시동생 파올로와 욕정의 불꽃에 사로잡힌 라벤나의 프란체스카, 요염한 몸뚱이를 꿈틀대는 시레네와 파우누스, 이름 모를 탕자들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괴물들이 어둠의 구덩이와 빛의 미끄러운 요철 사이에서 부둥켜안고 발버둥치며 무지와 맹목의 미친 바람을 그칠 줄 모르고 뿜어낸다. 눈물과 비통의 더운 바람과 절망과 저주의 서늘한 바람이 번갈아 울어대는 신음소리는 죽음의 희망마저 앗아가고 만다.

 

 

인간의 상처 표현

 

「지옥문」에는 안팎이 없다. 추락한 영혼들은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문과 문틀을 넘나들며 아우성친다. 그리고 커다란 눈먼 소용돌이를 이루며 저주의 구렁텅이를 맴돈다. 우리의 시선도 어지럽게 배회한다. 단테의 우주에서 영감을 길어 올린 로댕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200점이 넘는 인물상이 투입되고, 또 지옥문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조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침 공예박물관 신축계획이 수 차례 지연 끝에 결국 취소되자, 로댕은 더 이상 외부의 조건과 형식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기 시작한다. 「지옥문」은 거의 중세시대 대성당의 입구에 갖다 붙여도 될 만큼 규모가 커졌다. 끝도 없이 만들고 또 망가뜨렸지만 그 안에 포함될 인물과 소재, 군상들도 자꾸 불어났다. 로댕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노아의 방주」를 짓고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로댕은 무신론자였다. 그에게 구원과 저주는 빛과 어둠, 형태와 무질서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에서만 실재하는 개념이었다. 로댕의 작품에서 지옥에 유배된 영혼들조차 더운 숨결을 뱉어내는 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의 상처 입기 쉬운 존재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댕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숙한 상처를 관찰하는 예민한 눈을 가진 조각가였다. 그리고 자신의 투박한 손으로 영혼의 완전한 폐허를 쓸쓸한 서사시로 그려낼 줄 알았다. 선과 악, 삶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보듬고 끌어안는 것이 조각가의 신성한 의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소묘를 하면서 흑과 백이 모두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삶도 심미적인 면에서 선과 악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슬픔을 함부로 내다버려서는 안된다.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눈부시게 빛나는 기쁨처럼 슬픔도 우리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로댕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27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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