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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리투아니아 새벽의 문 경당 성모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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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4 ㅣ No.1535

[은총의 성모] 리투아니아 새벽의 문 경당 성모성화



유럽 도시들의 성문들은 종종 적으로부터의 공격에서 그 도시를 보호하고 그 문을 드나드는 여행자들을 축복하기 위해 종교적인 유물들을 모셔놓는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성모 성화 역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의 ‘새벽의 문’이라는 성문 위에 1671년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들을 위해 건축된 작은 경당에 모셔져 있는데, 경당의 중앙에 성모님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조각 사이에 안치되어 있다. 이 성화는 오늘날 리투아니아 신자들의 크나큰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성화는 북부 르네상스 스타일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 없이 묘사되어있으며, 64× 79cm의 크기에 2cm의 오크 나무로 만든 판자에 그려져 있으며,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졌고, 후대에 유화기법으로 다시 칠해졌다. 이 성화의 제작자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 제작 연도 또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략 1630년경이나 적어도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성모님은 황금빛 밝은 광채에 둘러 싸여 있으며, 머리 주위에 원형으로 빛나는 별들이 둘러 있는 등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도상에 따라서 그려져 있다.

원죄 없으신 동정녀를 나타내는 도상은 요한 묵시록 12장 1-2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후광에는 열두 개의 별이 그녀의 머리를 둘러싸고, 달을 밟고 빛나는 태양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구름과 황금빛 광채, 천사들, 그리고 여러 가지 꽃들이 추가되기도 한다. 특히 성모님의 옷은 장미, 튤립, 수선화, 카네이션 등 여섯 가지의 화려한 꽃들을 모티브로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꽃들은 마리아의 동정과 순결의 상징이다.

그리고 성모님의 몸 부분은 하늘의 여왕의 위엄 있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정교한 금과 은으로 만든 옷으로 덮었으며 왕관도 만들어져 덧붙여져 있다.

이렇게 손과 얼굴 등 피부 부분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금과 은 등 값비싼 재료로 표면을 덮어 성화를 장식하는 전통적인 기법을 리사라고 하는데, 주로 동방교회에서 많이 활용되는 기법이다.


자비로운 어머니이며 고통 받는 이들의 후원자임도 상기

성모님의 옷 부분은 금으로 도금된 은으로 세부분을 나누어 만들고 조립하였는데 각기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각기 다른 시기에 완성 되었다. 머리와 어깨부분은 1670~1690년에, 가슴 부분은 1670년에서 1690년 사이에 제작되었고, 그림의 하단은 1730년대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머리에는 두 개의 왕관이 장식되어있다. 바로코 양식의 작은 왕관은 성모님의 머리 부분에 부착시켜 놓았고 그 위에 다시 두 명의 작은 천사들이 색 유리로 장식된 로코코 양식의 커다란 왕관을 좌우에서 받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두 개의 왕관을 폴란드 왕국의 왕과 리투아니아 공국의 공작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27년, 이 이중의 왕관은 사람들이 기증한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교황 비오 11세의 축복을 받았다. 1927년 7월2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며 이 성화에 부착시켰고, 이후로 이 성화는 ‘자비의 어머니’라는 이름도 받았다. 그러나 처음 금으로 만든 왕관은 2차 세계 대전 중 분실되었다.

이 성화는 마리아의 겸손한 성격과 헌신적인 모습을 잘 보여고 있다. 성모님은 머리를 부드럽게 자신의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눈은 절반정도 감고 있으며, 그녀의 손은 가슴에서 포개어 겸손과 헌신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겸손한 종이며 동정녀이며, 자비로운 어머니이며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의 후원자임도 상기시켜주고 있다.

1761년 수도사 힐라리온은 이 성화의 성모 마리아에 의한 17가지 기적을 열거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가 기록 한 첫 번째 기적은 1671년 최초의 경당이 건축되었던 해에 발생했다. 두 살짜리 아이가 2층에서 돌로 포장된 길에 떨어져 심하게 부상을 입고 회복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그 아이의 부모들은 이 성화 앞에서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 했고, 그 다음 날 그 아이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1702년 대 북방전쟁 기간 중 빌니우스가 스웨덴 군인들에게 점령당했을 때 일어났다. 스웨덴 군인들은 개신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이 성화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이 성화 앞에서 기도와 성가 부르기를 금지 시켰다. 그리고 이 새벽의 문 주위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한 군인이 이 성모 성화를 향해 총을 쏘았다.(이때의 흔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모님의 오른쪽 소매에서 총알구멍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즉 성주간의 마지막인 성 토요일 아침 이 새벽의 문의 무거운 철문이 갑자기 쓰러졌다. 이때 네 명의 스웨덴 군인이 깔렸는데 두 사람은 즉시 사망했고 나머지 두 사람도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날, 부활절 아침에 리투아니아 군은 성공적으로 이 성문을 공격하고 도시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이 승리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령관은 은으로 만든 커다란 봉헌물을 이 경당에 봉헌했다.

그리고 1706년 이 도시에 큰 화재가 났을 때도 이 성화의 성모님께 도움을 청해 진화되었고, 1708년 성모의 은으로 만든 옷 장식을 훔치려던 러시아 군인이 큰 화를 입는 등 수많은 기적과 놀라운 치유의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성모성화는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와도 연결

이후 은혜를 입은 이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리고 청원을 드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 봉헌물을 바쳤다. 그 봉헌물은 보통 작은 심장모양, 십자가,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형, 치료를 필요로 하는 눈, 팔, 다리의 형상 등을 은으로 만든 것들이다. 현재 이 경당에는 약 8000개의 은으로 만든 봉헌물들이 달려 있으며, 성모님 성화 하단의 커다란 초승달 모양 아래에도 봉헌물들이 많이 걸려 있다.

오늘날 이 거룩한 형상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정교회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공경 받고 있으며, 세계 여러 곳에 진출한 리투아니아 이주민들 속에서 크게 공경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새벽의 문 성모성화는 하느님의 자비의 메시지와도 연결이 되게 된다. 성화에 ‘자비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수여되고 8년 후 성녀 파우시티나 코발스카야 수녀의 지도에 따라 유진 (Eugene Kazimierowski)에 의해 그려진 첫 하느님의 자비 형상이 공개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새벽의 문 위의 경당 성화의 신비스런 체험에 대해 썼다.

그에 따르면 새벽의 문 위의 경당 성모님 성화 축일(11월16일) 전날이며 9일 기도의 마지막 날인 1935년 11월15일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그 경당에 신자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그 성화의 성모님은 살아 움직이며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의문을 갖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하느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3월호, 글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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