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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2: 최양업 신부 (상) 13년 만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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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1 ㅣ No.455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2) 최양업 신부 (상) 13년 만의 귀국


칠흑같은 조선에 돌아온 '복음의 발'

 

 

최양업 신부.

 

 

1. 1849년 12월 말 조선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중국 봉황성 변문.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스승이자 선배 사제인 매스트르 신부와 아쉬운 작별을 한 채 조선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한 게 벌써 몇 번째였던가. 하지만 벽안의 이국인 사제가 철통같이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선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 자체였다.

 

이윽고 조선 땅 의주 관문이 눈앞에 보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 세찬 광풍이 휘몰아쳤고 혹독한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잠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최 신부와 밀사들이 관문 한복판을 지나쳤는데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마침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6번 시도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ㆍ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15살 소년이 28살 사제가 돼 귀국한 것이다. 최 신부의 머릿속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2. 13년 전인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 살던 소년 최양업은 서울 후동(현 을지로) 모방 신부 댁에 도착했다. 양업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불과 한 달 남짓한 모방 신부가 주변의 추천으로 선택한 첫 신학생이었다. 3월 14일에는 최방제가, 7월 11일에는 김대건이 합류했다.

 

세 소년은 그해 12월 3일 서울을 떠났다. 봉황성 변문을 통해 중국 땅을 가로 질러 내려와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 7일이었다. 6개월의 긴 여정이었다. 신학생으로서 본격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1월 27일 동료 최방제는 열병으로 숨졌다. 그뿐 아니었다. 마카오의 소요 사태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두 사람은 마닐라 롤롬보이로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3. 당시 조선에서는 기해박해(1839년)로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이 옥사 순교했다. 또 이듬해 초에는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마저 순교했다.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 홍주 다래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최경환과 이성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양업 집안은 증조부인 최한일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구교우 집안이었다. 양업의 할아버지 최인주는 이존창 가문인 경주 이씨와 혼인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가 최경환이었다.

 

양업이 6살이던 1827년쯤 아버지 형제들은 신앙생활에 좀더 충실하고자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러나 대가족이 함께 지내다 보니 주변에서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위험을 느낀 경환 형제들은 의논 끝에 각자 식구들을 데리고 흩어지기로 한다. 최경환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부평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양업이 신학생으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을 때가 이때였다.

 

4.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카오를 떠났다. 귀국로 탐색을 위한 첫 여정이었다. 8월 말 상해 인근 오송 항에 도착한 양업은 그곳에서 김대건과 만난다. 그해 10월 두 사람과 매스트르 신부, 브뤼니에르 신부 등은 상해를 출발해 요동으로 향했고, 요동반도 남쪽 태장하(현 요녕성 장하시) 해안에 도착해 백가점(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교우촌에 잠시 머무른다.

 

양업은 11월 초 김대건과 헤어져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요동반도 북단 개주 부근의 양관(현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을 거쳐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교우촌 소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향)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이어 1843년 3월 입국로를 탐색하고 돌아온 김대건에게서 기해박해 소식을 듣는다. 부모의 순교 소식을 들은 것도 김대건을 통해서였다.

 

최양업은 1844년 12월 소팔가자에서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다시 조선에 들어가 입국로를 마련한 후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고는 조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공부를 계속하다 1846년 초에는 동북쪽 훈춘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또 그해 말에는 서북쪽으로 다시 귀국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병오박해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밀사들의 말에 돌아서야 했다. 자신의 귀국 좌절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동료 김대건의 순교 소식이었다.

 

5. 양업은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를 찾아 1847년 초 홍콩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기해ㆍ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파리로 보냈다. 그해 여름 다시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으나 서해 고군산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함으로써 네 번째 탐색 여행도 실패하고 만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양업은 예수회 서가회 신학원에서 마지막 신학공부를 마치고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마레스카 주교에게서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로 서품된다. 최 신부는 서해 뱃길로 다섯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다시 실패하고 만주 요동으로 양관과 차쿠에서 중국 신자들을 위해 사목한다.

 

그리고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여섯 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1849년 12월이었다. 하지만 봉황성 변문에서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지고는 홀로 조선 땅에 들어온다.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평화신문, 2009년 7월 19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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