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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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성탄의 가장 깊은 신비 - 인간이 되신 하느님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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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성탄의 가장 깊은 신비 - 인간이 되신 하느님과 함께!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한 처음에”(요한 1,1), 즉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의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분(1,14)이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Immanu + El)(마태 1,23)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구약의 이스라엘이 믿었던 야훼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제2위격이신 천주 성자께서 한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인 마리아(Maria)는 라틴어식 표현이고, 히브리어로는 미리암(Miriam), 예수님 당시 사용되던 아람어로는 미르암입니다. 마리아는 나자렛 출신인데, 복음사가들은 그 여인을 ‘동정녀’라 합니다. 마태 1,23에 나오는 동정녀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 근거합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 여기서 ‘젊은 여인’을 ‘70인역 성경’(LXX)에서는 동정녀(Parthenos)라 번역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이 구절에 근거해 메시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 믿었고, 동정녀에 의한 출산과 메시아 탄생을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이사야가 말한 것은 젊은 여인이지 동정녀가 아니라 주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젊은 여인은 ‘알마’(Almah)이고, 동정녀는 ‘베툴라’(Betulah)인데, 이사야서에는 ‘알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흔히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은 알마가 아니라 ‘나아라’(Naala)였습니다. 그리고 ‘알마’라 지칭되는 여성들은 흔히 가임기 여성이나 처녀, 동정녀 등으로도 사용되었고, 특히 70인역 성경은 이 단어를 동정녀라 번역했기에 초기 교회와 복음사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 이름을 바로 ‘예수’라고 알려주지만, 마태오복음서에서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사야의 예언을 들려줍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아베(Ave), 마리아!(루카 1,26-38)
루카복음 1장 중반부에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그 당시 일반적인 인사는 히브리어 ‘샬롬’(Shalom, 평화가 너와 함께!)인데, 여기서 천사는 그리스식 인사인 ‘카이레’(Chaire, 기뻐하여라)라 합니다. 그리스어 ‘카이레’는 라틴어 ‘아베’(Ave 기뻐하소서)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기쁨’(chaire)과 ‘은총’(charis)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이고, 서로 연결된 의미입니다. 복음에서 ‘카이레’라는 표현이 사용된 대표적인 경우는 예수님 탄생하는 때에 목동들에게 했던 인사(루카 2,10)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요한 20,20) 두 경우입니다.
‘기뻐하여라’라는 인사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구약의 스바니아 예언서의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기뻐하여라, 딸 시온아, … 주 너의 하느님이 네 한가운데 계시다.”(3,14-17) 기쁨의 이유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고, “네 한가운데 계시다”라는 표현은 ‘네 모태 안에 계시다’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스바니아서의 이 구절은 시온에 있는 계약의 궤 안에 하느님이 거처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마리아는 시온의 딸로 여겼고,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예수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가 바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계약의 궤, 즉 주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에서 “사셨다”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인데,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천막을 치다’입니다. 즉 구약 때 성막을 치고 계약의 궤를 모신 것처럼, 신약이 시작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성막과 같은 마리아의 태 안에 들어오심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성령을 통한 잉태 예고입니다. 이런 상황은 구약의 계시 방식과 비슷하면서도, 구약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심’은 예수님 탄생이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에 의한 신비로운 사건이며,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경의 고백처럼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기에 성령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하느님 아드님을 태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원리이십니다. 이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알려줍니다.(루카 1,31)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처럼 살기!
요한복음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강조가 중심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시작되고, 낮과 밤이 생겼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세상이 시작되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신데, 요한은 그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분’(참조 요한 1,14)을 예수님이라 증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후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셨을까요? 한 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불완전하고 고통 가득한 인간 삶 안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 구원의 길입니다. ‘길’(道)을 깨우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고, 이 길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이 길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해 때론 말로, 때론 삶으로 직접 올바른 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가신 길을 잘 따라오라고 초대하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삶에 지치고 힘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
[성모님의 군단, 2026년 1월호,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0 18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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