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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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본 다시 읽기: 레지오 선서문에 나타난 신학적 문제점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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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본 다시 읽기] 레지오 선서문에 나타난 신학적 문제점 (1)
레지오 마리애의 일반 행동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단 선서를 해야만 하는데, 그 선서문은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제15장(141~142쪽)에 정형화된 형태로 나와 있다. 레지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라고 부르며 시작하는데, 이후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계속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성령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에 대한 구원사적 맥락의 신앙 고백을 배경으로 하여 선서문이 전개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서문의 일부 내용, 특히 다음의 두 번째 단락에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점이 한국 교회 안에서 계속 지적되고 있다.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이 두 번째 단락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상 레지오 마리애의 수호성인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St. Louis-Marie Grignion de Montfort, 1673~1716)의 저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25항과 206항에서 주로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서 성 루도비코는 성모 마리아가 삼위일체의 성자와 성령 모두에 대하여 그 거룩한 은총의 관리자요 분배자가 되기에, 인간을 향한 그 은총의 중개와 분배는 전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자유로운 뜻에 달린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충실한 정배이신 마리아에게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선물들을 맡겨 주셨고, 마리아를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분배자로 선택하셨으므로, 마리아는 성령의 이 모든 선물과 은총을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또 원하는 방법대로 나누어 주신다. 그러므로 천상 선물이 마리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마리아를 통해서 받게 되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25항)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덕의 출납관이며 분배자이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하고, 새롭고, 귀중하고, 향기로운 옷으로 우리를 입혀 주시고,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덕행을 당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고 싶을 때에, 주고 싶은 대로. 주고 싶은 만큼 주신다.”(206항)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가 쓴 책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레지오 마리애 영성의 원천”이라고 교본(제5장, 43쪽)에서 소개된다. 따라서 “이분은 사실상 레지오의 스승”으로서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이분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고, 레지오의 기도문들은 바로 이분이 하신 말들을 그대로 반영”(교본 제24장, 212쪽)하는 것으로 이해될 정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의 글을 따라, 교본 제5장(38~39쪽)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재자’(Mediatrix of all graces)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레지오는 성모님을 한없이 신뢰한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안배하심으로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주셨으며, 성모님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풍성히 받으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의 은총을 전달하는 특별한 수단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모님과 더불어 나아간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 훨씬 손쉽게 풍성한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성모님이 성령의 거룩한 짝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어 주신 모든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로(水路)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시면 아무런 은총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성모님은 이 모든 은총을 단순히 전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것을 더욱 힘써 얻어 내신다. 레지오는 이와 같은 성모님의 역할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단원들에게 이를 특별한 신심으로 실천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초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 작성되었던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의 책을 오늘날 우리가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고 성경은 증언하는데, 이와 달리 오직 성모 마리아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시는 은총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통로인가? 마리아 외에는 하느님 은총의 다양한 통로가 전혀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내용이 담긴 레지오 선서문의 두 번째 단락은 이른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Ad Jesum per Mariam)라는 마리아 신심의 격언 같은 구절이 매우 과장되게 해석되어 있어, 그 내용이 반드시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한국 교회의 여러 신학자와 사목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의 일부 표현에 대하여 이미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 이제 자연스럽게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대목을 수사학적으로 일종의 주관적인 강조 어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선서문이라는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고백 형식을 통하여 그 내용이 천명되기에 문제가 된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 경륜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보편적 활동을 사실상 마리아에게 종속시키고 배타적으로 한정시키는 신학적 오류가 여기에서 발견된다.
한마디로, 선서문의 두 번째 단락에서 문제의 핵심은,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성덕과 은총의 유일무이한 통로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the universal presence and activity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신학적 명제와 부합하지 않고 어긋난다. 이 명제의 성서적 근거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라는 구약 성경 지혜서 1장 7절의 말씀이다.
이처럼 선서문의 내용에 대한 신학적 차원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선서문에 나타난 일부 표현이 우리 시대의 한국 교회 신자들을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게 할 수 있기에 이를 우려하기 때문이지, 레지오 마리애 신심 운동에 담긴 신앙적 직관의 풍요로움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9월호, 박준양 세례자 요한 신부(서울 무염시태 Se. 전담사제)] 1 2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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