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5일 (토)
(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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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09 ㅣ No.987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나가사키는 가톨릭 성인 26위를 배출한 곳으로, 1862년 교황 비오 9세가 이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실 만큼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해’라는 테마로 이곳 나가사키를 방문하였다. 1981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나가사키를 방문하였다. 나가사키는 특히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 바오로)가 17세기 일본 막부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소재로 쓴 ‘침묵’(1966년)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가사키는 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참상의 지역으로 먼저 기억된다. 1945년 미국은 2차대전 종전 전에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군은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한 개를 떨어뜨렸다. 나가사키에서만 약 8만 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들은 폭발 당시에 가장 많았고, 그 이후 피폭과 기타 질병 합병증과 부상으로 사망자가 계속 발생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6일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연합국에 선언했다.

 

나가사키 원폭의 낙하중심지 북쪽 나지막한 언덕에 평화공원이 있다. 일본의 학생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전쟁의 참상과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묵념하고, 세계평화의 염원을 담아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바친다. 매년 8월 9일, 원폭이 떨어진 날을 ‘나가사키 평화의 날’로 정하고 평화공원 기념상 앞에서 예식을 하며 전 세계를 향해 평화 선언을 하고 있다. 이곳 ‘평화의 분수대’는 피폭되어 몸속까지 다 타버려 물을 갈망하며 죽어간 영혼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곳이다. 

 

후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본래 원폭 투하 목적지는 고쿠라였다. 하지만 구름이 도시를 가려 투하 시도를 못했고, 계속 기회를 엿보며 비행하다가 연료 부족으로 대체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향했다고 한다. 그날 날씨가 수만 명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다. 고쿠라시에는 천운이었지만 나가사키시는 대재앙의 날이 된 것이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약 8만 명 사망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가까운 곳에 ‘나가사키의 성자’라 불리는 나가이 다카시(바오로) 박사(1908-1951)의 ‘여기당(如己堂)’과 기념관이 조촐하게 마련되어 있다. 여기당의 ‘여기’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일본어 번역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당은 그가 마지막까지 투병하며 저술하고 기도와 묵상을 했던 한 평 반 남짓의 판잣집이다. 작은방에는 그가 쓰던 작은 책상, 저술한 책들, 그의 투병 사진, 성모상이 눈에 띈다.

 

나가이 다카시는 의사이며 원자물리학자로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1932년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방사선 연구에 매진했다. 이 대학병원에서 결핵 등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며 고군분투했지만, 당시엔 이렇다 할 보호장비가 없었기에 진료와 연구 중에 많은 방사선에 노출되어 194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당시 백혈병 진단은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날인 1945년 8월 9일, 집에 있던 사랑하는 그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나가이 박사도 나가사키병원에서 진료 중 병원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도 머리 오른쪽 부분 동맥이 끊어지는 중상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거리와 산길을 누비며 피폭자를 치료했다. 이는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난 사랑의 실천이었다. 또한 그는 후대를 위해 원폭의 피해 양상을 입체적으로 조사했다. 환자들의 피폭 상태를 조사해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원폭 피해 보고서가 되었고, 이를 주제로 소설을 집필해 최초의 원폭 문학자가 되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정진하자는 평화의 메시지 남겨

 

이후로도 그는 다수의 저서를 남기며 세계평화를 위해 메시지를 전했다. 피폭 희생자로서 반전(反戰)과 희망을 외치는 그의 저서는 일본을 넘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자녀와 투병하던 나가이 박사는 1951년 5월 1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은 영화와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묵주알’로 소개된 수필집은 그의 신앙고백서이다. 이 책에는 원자폭탄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도 고통을 지닌 채 어린 두 자녀와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한 신앙인의 고백을 담고 있다.

 

“원자폭탄은 우리들 머리 위에 작렬했다. 나는 부상을 입었다.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환자들 구호로 바빴다. 5시간 후 나는 출혈로 쓰러졌다. 그때 나는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숨이 있는 한 기어서라도 꼭 찾아올 사람이었기에… 3일째 사상자의 조치를 일단 끝내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다. 일대는 잿더미였다. 나는 곧 찾아냈다. 부엌이었던 장소에서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타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옆에는 십자가가 붙은 묵주가 있었다. 타고 남은 양동이에 아내의 뼈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묘까지 갔다. 이웃 사람들도 모두 죽고 석양빛이 비치는 재위에 검은 뼈들이 점점이 보였다. 아내가 내 뼈를 안고 갈 예정이었는데. 운명이란 모르는 것이다. 내 팔 안에서 아내가 바삭바삭 인산석회의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나가이 다카시 저, ‘묵주알’ 중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 뜻 안에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정진하자는 평화의 메시지를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성자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을 이은 ‘나가이 다카시 기념 나가사키 평화상’은 방사선 피해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공헌한 이들을 찾아 시상하고 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9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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