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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0) 노동문제에 대한 첫 관심, 강화 심도직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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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9-07 ㅣ No.1898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0) 노동문제에 대한 첫 관심, 강화 심도직물 사건


고통받는 노동자 편에 선 한국교회, 사회정의 실현 전면에 나서다

 

 

- 강화 심도직물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이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건의해 열린 임시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시국 선언 이후 전원 복직됐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과 찍은 기념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불평등의 심화, 노동자 착취 극심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와 경제 성장 제일주의를 앞세워 권위주의적인 정치 및 경제 개발 정책을 억압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결탁한 자본가들의 혹독한 노동 착취는 수많은 가난한 이의 삶을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은 심화된 권위주의적인 정치 상황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되고 있었습니다. 피폐해진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매년 50만 명 이상이 도시로 흘러들었습니다. 성장 제일의 경제 정책은 도시로 몰려든 과잉인구를 저임금과 노동 착취로 내몰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시달리며 궁핍한 삶을 이어가야 했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을 지켜나갈 아무런 방편도 없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인간의 존엄과 현세에 대한 깊은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한국교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당대의 시대적 요청을 온전히 능동적이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백성이 처한 시대 상황을 공의회 정신에 비추어 성찰하고 삶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공의회가 촉발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

 

1967년 7월, ‘우리의 사회 신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한국 주교단 공동선언은 세상 속 교회를 선언한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두고 노사 관계와 국가의 역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선언은 “현 한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제반 사정을 실감하며,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서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또한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목표와 방법들을 제시”한다며 총 23개 항목을 ‘신조’로 제시했습니다. 선언은 특히 모든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당한 임금이 지불돼야 함은 물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와 집단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공의회를 통해 세상 속 교회라는 자의식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고통스러운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은 교회 안의 그런 인식과 움직임이 처음으로 사회 현실과 첨예하게 맞부딪힌 사건이었습니다.

 

-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5월 10일 강화도 옛 심도직물 공장터에서 ‘강화 심도직물 사건’ 기념 조형물을 축복하고 있다.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JOC

 

가톨릭시보는 1968년 1월 21자 3면에서 심도직물 사건을 여러 꼭지의 기사를 통해 매우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강화 직물업자, 종교 자유 침해 신자 채용 거부 – 가톨릭노동청년(JOC)운동 정신에 입각한 강화도 JOC의 정당한 임금 지불 및 노동 시간 준수 등 노동운동이 현지의 20개 직물업자들의 부당한 반응으로 시비가 벌어졌다. 이 시비는 4일 ‘심도직물’에서 동 직물 노조 분회장을 해임한 후 시작하여 업주들이 천주교 신자는 채용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강화본당 JOC 지도신부의 성무 집행과 노동운동 지도를 방해하고 현지 경찰서장이 지도신부에게 ‘반공법 위반’ 운운으로 협박하는가 하면 업주 측 노동자들의 시위 등이 벌어졌다.”(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1일자 3면)

 

1925년 벨기에 조셉 까르딘 추기경이 창설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58년경 한국에 처음 도입됐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돼 청년 노동자의 존엄성을 사회에 일깨우고, 노동의 가치와 보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천교구 강화도본당 주임이자 JOC 지도신부였던 외국인 선교사 전 미카엘(Michael Bransfield, 1929~1989) 신부가 강화도본당을 중심으로 JOC 활동을 조직하고 지원했습니다.

 

1967년 5월 14일 JOC의 지원으로 심도직물이라는 직물공장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 1200여 명의 노동자 중 900여 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사측은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회원 2명을 부당 해고했고, 이에 노조원들은 강화도성당에 모여 진상 보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때 경찰이 출동해 30여 명의 천주교 신자를 연행했고, 심도직물 사주와 강화경찰서장이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와 노조 활동에 계속 개입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심지어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 연합체인 ‘강화직물협의회’는 JOC 회원은 앞으로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중앙 일간지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사측은 150여 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전 신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경찰은 전 신부를 연행해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나아가 인천교구장 나길모(굴리엘모) 주교에게 전 신부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 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1일자 3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회의 대응

 

악화일로로 치닫던 상황 속에서, 나길모 주교는 담화를 통해 사측과 경찰 당국에 항의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나 주교는 특히 이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노사 분규를 넘어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JOC 총재는 1969년에 한국 첫 추기경에 서임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었습니다. 김 추기경은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고 주교들을 설득,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단체 행동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포함해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을 담았습니다.

 

주교단의 성명서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급진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바오로 6세 교황은 한국 주교단에 격려와 지지의 서한을 보내옵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일관된 항의와 교황청의 지지가 전해지면서, 정부는 비로소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되고 심도직물이 이끄는 강화직물협의회는 이전의 결의를 폐기하고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게 됩니다.

 

강화 심도직물 사건은 공의회 이후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시국 문제에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나선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이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문제는 물론 민주화와 인권운동, 민족화해, 사회정의 실현 등 우리 사회 각 부문의 다양한 현실 참여 영역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7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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