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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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영성: 황사영의 아현동 신앙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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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9-07 ㅣ No.2426

[순교영성] 황사영의 아현동 신앙 공동체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려 배론으로 피신하던 중 경기도 평구에서 김한빈을 만나 동행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탁희성 화백, 절두산 순교성지 제공)

 

 

황사영은 신유박해 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검거 선풍 속에서 교회는 그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도성 탈출을 위한 입체적인 작전이 수행되었습니다. 그는 여럿의 도움을 받아 상주 복장으로 트레이드 마크 같았던 구레나룻 수염까지 족집게로 뽑아가며 변장을 한 채 도성을 빠져나가 곡절 끝에 배론 토굴에 몸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탈출에서 은신까지의 전 과정이 너무도 극적이었습니다.

 

명문 공신 집안의 적장자였던 그는 자신이 살던 아현동 집의 사당을 헐고, 거기에 성물 공방을 만들어 붓 만드는 필공(筆工)인 신자 남송로를 입주시켰습니다. 아현동 신앙 공동체에는 노비와 여종, 그리고 기술직 중인 등 지체 낮은 사람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정광수의 벽동 교회가 양반 위주로 이루어진 것과는 명확하게 달랐지요.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필공(筆工) 남송로와 곽만이, 또 아현 월변곡(越邊谷)의 김치호 같은 장인들이 모여 성화와 성상(聖像)을 제작한 일입니다. 목수 황태복과 한대익, 신 만들던 제관득과 근처 둥그재의 갓 만드는 신춘득, 서소문의 갓 만드는 장인 최윤신 등도 성물 제작에 참여한 것이 확인됩니다. 당시 전국 교회 조직에 필요한 교리서 필사 및 제작 보급은 주로 과부 모임이나 교리교사 조직을 활용한 정광수의 교회가 담당했고, 십자가와 성화 및 성상, 묵주 등의 제작은 아현동이 주도하여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출입한 인원 구성은 전국적이었습니다. 호서 사람으로 황사영의 집에 여러 해 살았던 이국승, 당진에서 올라와 황사영의 집 초당에 기대 살던 이순명, 충청도의 이생원, 평양에서 온 남가와 이진영, 평산 사람 고광성 외에 아현의 김의호와 도저동 서리 조신행과 신여권, 남대문 안 최태산, 둥그재의 이학규, 석정동의 남필용, 정동 윤종연, 경영교 이청풍, 서강 농암에 사는 최봉운 등 각 지역과 여러 구역의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아현동 교회의 성격과 역할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밖에 노비 육손과 돌이, 여종 판례와 고음련, 복덕, 여종의 남편 박삼취 등도 모두 황사영을 도운 죄로 함경도 끝 삼수와 갑산 등의 험지에 석방 없는 관노로 끌려갔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주인에 대한 의리와 신앙을 끝까지 지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진술들을 조각보처럼 모으자 생각지 못한 장대한 서사가 드러납니다. 당시 교회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고문 끝에 함경도 변방의 관노로 끌려가 죽어갔을 황사영의 종들, 그밖에 이름도 알 수 없는 더 많은 신자들의 비명과 순교의 피로 오늘의 교회가 섰습니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해서 그 뜨거웠던 시간들을 우리의 무감각해진 마음속으로 끌어올 수는 없는 걸까요?

 

[2025년 9월 7일(다해) 연중 제23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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