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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성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경남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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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7-13 ㅣ No.1877

[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성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경남 선교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을 처음 소개할 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썼다. 1950년대 이후 거제지역과 서부경남지역에서 선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성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비록 자세하고 개별적인 지면은 마련할 수 없지만 이번 한 번이라도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적는다.

 

 

거제지역 선교

 

이탈리아 제노바관구 출신으로 중국에서 14년간 전교하고 있던 주부의 콘스탄시오 신부는 한국에 진출하기 위하여 1955년 12월 3일 부산항에 닿았다.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를 찾아갔고, 12월 15일에는 거제읍 거제본당에 도착했다. 이듬해 2월 초에는 이탈리아에서 강지홍 도나도 신부와 나(羅) 루이지 신부가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기다리고 있던 주 신부와 함께 거제에 자리를 잡았다. 거제읍에 조그만 주택을 매입하여 임시 수도원으로 정하고 지리와 풍토를 익히면서 한국어 공부에 힘을 쏟았다. 거제성당와 장승포성당에서 본당신부의 사목을 지원하고, 멀리 옥포 등 여러 공소를 순회 방문하여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행하며 거제도 내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나 신부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전쟁 직후라 의식주 생활이 어렵고 온갖 질병이 만연했지만 주 신부와 강 신부는 잘 이겨내며 전교했다. 그해 12월 말에 주 신부는 제8대 거제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주 신부는 거제읍을 중심으로 전교와 빈민구호에 힘쓰면서 본당사목에 전념하고, 강 신부는 장승포본당 박문선 신부의 협력을 받으면서 군내에 있는 여러 공소를 두루 다니며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 1957년 6월 제8대 거제본당 주임 주부의 콘스탄시오 신부 송별기념

 

 

서부경남지역 선교

 

1957년 1월 부산교구가 설정되었다. 서정길 요한 주교와 부산교구의 최재선 요한 주교는 거제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에게 진주 옥봉본당구를 맡겨 서부경남의 전교에 힘쓰도록 합의하였다.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한 이들은 진주로 옮겨, 서부경남지역에서 선교사업의 꿈을 실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진주와 하동과 산청은 주 신부가 맡고, 사천과 삼천포와 남해는 강 신부가 맡기로 했다. 

 

1957년 6월 주 신부는 옥봉동본당의 제7대 주임으로 부임하고 강 신부는 삼천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두 사람은 삼천포본당에 사제관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옥봉동에서 함께 기거하며 수도생활과 더불어 자신들이 맡은 서부경남지역 선교에 전력했다. 

 

강 신부는 삼천포성당을 중심으로 사천공소도 사목하였다. 예비신자를 모아 교리교육을 하고, 14개 공소를 설립하였다. 1959년에는 삼천포성당에 극빈자 급식소를 개설하여 빈민구호를 활발히 전개하고, 사제관도 완공했다. 1960년에는 남해 읍내에 대지를 매입하고 강당 신축을 시작했고, 1961년 말 신자가 급증한 남해공소는 본당으로 승격했다. 1962년에 사천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본당신부는 안상철 굴리엘모 신부가 맡았다. 1963년 10월 강 도나도 신부가 휴가차 고향으로 일시 귀국하게 됨으로써 삼천포본당은 사천본당의 안 굴리엘모 신부가 겸임으로 맡고, 남해본당은 남성남 갈멜로 신부가 제2대 본당신부를 맡았다. 남 신부는 본당과 15개 공소를 정성껏 사목하였고, 1966년 말을 끝으로 새로 설립된 마산교구에 사목을 넘겼다. 삼천포본당도 1966년 3월에 마산교구로 넘겨졌다.

 

사천본당 안 굴리엘모 신부에 이어, 1965년 5월부터는 제2대 본당신부로 진우영 안젤리코 신부가 부임했다. 유치원을 신축하여 개설하고, 성당묘지를 설치하고, 상수도시설을 완비하는 등 본당을 잘 가꾸었다. 1968년 1월에 마산교구에 본당사목을 넘기며 성프란치스코회의 남해안 본당선교사업은 완전히 마산교구로 이양되었다.

 

 

 

 

주부의 콘스탄시오 신부

 

주 신부는 옥봉동본당의 주임으로 진주 시내의 장재실과 의령, 하동과 산청을 두루 다니면서 공소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1959년에는 협소한 하동공소를 확장하여 장차 본당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전면 보수했다. 1965년 말에 하동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고 마산교구로 이관했다. 1966년 1월 산청본당이 설립되고, 마산교구로 이관될 때까지 생비량, 단계, 청현, 하정, 방목, 자양, 송강, 장죽 8개의 공소가 설치 될 정도로 선교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 1963년 10월 영세식 후 사천본당 초대 주임 안상철 굴리엘모 신부와 신자들

 

 

주 신부는 진주 이현동 소재 나환자시설 구생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물질적으로 도우면서 교리반을 열어 영세를 준비시켰다. 강 도나도 신부와 함께 나환자를 위한 병원과 마을을 이상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지역을 물색했다. 1959년에 산청군 경호강변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과수원과 전답과 임야를 매입했다. 그해 6월 구생원에서 영세시킨 환자 60명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성심원’을 이루었다. 환자들에게 굳은 신앙과 삶의 희망을 주며, 1961년 8월에는 정부로부터 나환자수용시설 인가를 받아 여러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1962년 마침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하다가 추방당하여 대만에 머물던 정 시몬 신부가 진주로 와서 성심원의 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성프란시스코회는 나병을 퇴치하는 것과 환자를 조속히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67년 4월에 정부로부터 비영리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성심인애병원’을 개원했다. 또 미감아들을 건강하게 기르고 교육하기 위해 그해 10월에는 대전시 갈마동에 ‘요한23세 소년마을’을 개설하였다.

 

1962년은 주 신부는 은경축을 기념하고 재정지원자들을 물색하기 위해 본국으로 갔다가 돌아와 1963년 1월부터 다시 진주에서 활동했다. 진주시 칠암동 남강변 부지를 매입하고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성프란치스코의 집’ 양로원을 운영했다. 주 신부는 이탈리아의 성프란치스코수도회 제노바관구로 지원을 요청했다. 진주지역에 늘어나는 교우와 활발한 신심활동을 들어 수도원과 새로운 본당을 세우는 일이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몇몇 선교사들이 진주에서 힘을 모았다. 칠암동에 성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심을 수도원 건축을 위한 많은 건축비용은 제노바관구에서 지원하여 1965년 5월 18일 준공 축성식을 했다. 

 

▶ 참고 참고 <마산교구40년사> 마산교구 홈페이지, 칠암동성당·성심원 홈페이지 등

 

[2025년 7월 13일(다해)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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