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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2) JOC와 레지오 마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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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7-06 ㅣ No.1874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2) JOC와 레지오 마리애


날로 성장하는 신심 단체… 세상 향한 복음 실천 선봉에 서다

 

 

- 1953년 5월 31일 열린 한국교회 최초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중 하나인 목포 산정동본당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의 첫 주회합 모습.

 

 

6·25전쟁 후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의 아픔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겪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교회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의 다툼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온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더 이상 형제들이 서로 오갈 수 없게 됐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가 희생됐고 교회 시설들도 파괴됐습니다. 북한 지역의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어 신앙의 자유를 빼앗겼고, 찾아가지도 못하는 곳이 됐습니다. 전쟁의 뼈아픈 체험을 통해, 교회는 민족적 고통이 곧 교회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후 스스로 민족사의 일부가 된 교회는 이후 시대와 역사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고 부조리한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교회 안에는 복음 선포와 예언자적 소명 실천에 크게 기여할 두 가지 단체가 조직됩니다.

 

하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라는 이름의 사회적 신앙 실천 단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대표적인 신심 단체 중 하나인 레지오 마리애입니다. 이 두 단체는 장차 한국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자신의 울타리 안에 소극적으로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해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 대표하는 신심 단체

 

레지오 마리애는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에서 프랭크 더프와 20대의 젊은 여성 15명이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방문 봉사를 위해 만든 ‘자비의 모후회’에서 처음 시작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53년 도입됐습니다. 당시 광주지목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는 전쟁의 상처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한국 사회의 내적 치유를 위해 기도와 봉사를 위한 신심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 계기가 됐습니다.

 

이에 따라 그해 5월 31일 전남 목포시 산정동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경동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됐습니다. 단원들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지목구 관할 거의 전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가정 방문을 통한 입교 권면과 공소 교리 지도, 냉담자 방문, 혼인 장애 해소 권면, 환자 방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창설 3년 만에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제주, 서울 순으로 빠르게 확장됐고, 25주년을 맞은 1978년에는 1830개 쁘레시디움에 7만여 명의 단원을 보유한 큰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2003년, 50주년을 맞아서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오십년사」를 편찬하고 전국 단위 심포지엄을 통해 내적 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50주년을 맞은 2003년 5월 18일자 1면에서 50주년 기념 신앙대회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한국 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50주년을 맞아 5월 8일 오후 1시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기념 신앙대회를 개최하고 성모님의 군사로서 복음화에 앞장서는 도구가 될 것을 새롭게 다짐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경축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의 거룩한 모범이 항상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을 비추고 있다’며 ‘적극적이고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복음의 힘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가톨릭신문, 2003년 5월 18일자 1면)

 

- 대구 가톨릭노동청년회가 2011년 6월 19일 창립 50주년 감사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자 인권 수호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교회의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한국 교회의 성장과 신자들의 신심 성숙에 기여했다면, JOC는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노동과 인권 수호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는 수많은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JOC는 1927년 벨기에의 조셉 카르딘 추기경이 설립한 가톨릭 노동운동 단체로, 한국에서는 카르딘 추기경의 방한을 계기로 1958년 조직됐습니다. 가톨릭시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20개국 노동자들의 실태를 시찰하기 위해 각국을 방문 중이던 JOC 운동의 창시자 조셉 카르딘 몬시뇰은 11월 14일 우리나라를 방문해 서울에서 4일간 머물면서 한국의 사회 실태와 노동 운동 현황, JOC 운동 진출에 대한 정세 시찰을 했다. …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 90여 개국에 지부를 두고 5백만 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작년 8월 말 로마에서 87개국 대표 3만 명의 청년들이 모인 성대한 세계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이 운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유물론에 기반한 노동운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노동운동을 하는 것’으로서, 노동이란 예수님이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신성한 것이며 천주의 천지만물 창조의 목적에 협력하여 이를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가톨릭시보, 1958년 12월 8일자 6면)

 

카르딘 추기경의 방한 직전인 1958년 6월 JOC 관련 책자를 연구하던 서울대 부속병원 간호사 10여 명은 당시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인 박성종(프란치스코) 신부 지도로 첫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카르딘 추기경 방한에 맞춰 같은 해 11월 17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9명이 선서식과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JOC가 공식 발족됐습니다.

 

JOC는 이후 각 본당과 직장에서 조직을 확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1960년 서울교구연합회가 결성됐습니다. 1961년부터 지방 교구로 조직이 확산돼 10월 21일 전국연합회가 발족됐고, 11월에는 주교회의에서 가톨릭 평신도 단체로 정식 인준을 받아,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에 정식 가입했습니다.

 

JOC는 전체주의적인 정치 상황과 개발독재의 와중에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의 신성함을 수호하기 위해 조직됐습니다.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늘어나는 노동 청년들을 활동 대상으로, 각 산업체의 노조 결성과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동 강좌 개설, 직업여성 실태 조사 등 노동자의 인권 신장과 복지 향상을 위해 힘썼습니다.

 

특히 JOC는 인권 의식이 결여된 기업들과 정부의 탄압 속에서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 등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과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과 맥을 같이 하면서 교회의 사회교리 실천의 대표적인 사례들로 자리 잡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7월 6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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