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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오롯이 따라 산 김수업 토마스 아퀴나스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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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오롯이 따라 산 김수업 토마스 아퀴나스 교수
꾸르실료 교육으로 굳건한 주춧돌이 놓여
김수업은 1966년 부활절에 대구 신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영남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의 소개로 가톨릭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칠암동성당에서는 1971년에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천신의 모후Pr.을 창립하여 초대 단장을 맡았고, 이듬해 칠암꾸리아 초대 부단장을 맡았다. 1980년에 진주꼬미시움 초대 단장, 1982년 칠암꾸리아 단장을 맡아 성모님의 군대에 열성을 바쳤고 레지오 확장에 앞장섰다.
김수업 교수는 본당에서 어떤 직책이라도 받아들였다. 1976년에는 사목회장을 맡아 3년간 헌신했는데, 임기 중에는 성당묘지를 조성하고 묘지관리위원장으로 일하며 기반을 굳혔다. 성소후원회 회장도 두 번이나 맡아서 회원들과 상호작용하며 활성화의 방안을 마련했다.
1978년에는 교구 가톨릭교수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경상대학교 내 연구실에 사무실을 두었다. 교구 교수들의 교리공부를 기획하고 마산·대구·안동·부산 영남4교구 합동세미나를 추진했다. 또한 교수회는 가톨릭학생회 활동도 지원했다.
성령쇄신대회가 1980년대에 칠암동성당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자들에게 신앙의 본질과 깊이를 깨닫게 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쇄신과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며 교구 전체로 번져나갔다. 김수업 토마스 교수는 1989년부터 4년간 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을 맡아 성령기도회, 세미나, 교구대회 등을 이끌었다.
김수업 교수의 성모신심은 매우 깊었다. 1986년 9월 교구 성모기사회를 창립하여 성모신심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각 본당 내 전교활동을 돕고, 각 지역의 환경미화에 도움을 주었으며, 태아수호기도와 낙태방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에 몸을 낮추며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우리 지역에서 1975년 10월 ‘진주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김수업 초대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봉사했다. 진주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91년부터 경남지구형제회라는 이름으로 마산교구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김수업 교수는 교구에서도 초대 회장을 맡았고, 연임하여 6년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한국국가형제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96년부터 연임하며 6년간 한국국가형제회 회장을 역임하고도, 2009년부터 또 3년간 회장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2회로 제한되어 있는 임기 규정을 변경하면서까지 임무를 맡겼으니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에 닿아 있었다.
김수업 토마스 교수는 언제나 낮은 자세로 어려운 이웃의 벗이 되어 주었다. 만나면 늘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손을 내밀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안부를 묻고, 걱정해 주고, 도울 수 있는 길을 끝까지 찾아 직접 도와준 사례가 매우 많았다.
1972년에는 형편이 어려워 정규학교를 못 간 이들을 모아 성당에다 야간 재건중학교를 열어 도움을 주었다. 물질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빈첸시오회의 창립회원으로 기꺼이 참여하였다. 성령기도회를 열어 지친 이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1980년대에는 프란치스코양로원에서 성령세미나를 열어, 시설에 사는 외로운 노인들의 응어리진 한을 달래주는 일을 하였다. 우리말이 서툴러서 고생하는 베트남 사제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그는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타고 하동이나 남해까지 다니면서 레지오 마리애 회합이나 재속3회 연수에 참석하여 지도하였다. 직장 일을 마치면 여러 성당에 가서 성령세미나를 열어 불을 놓았다. 교구든 본당이든 강의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든 순명했다. 교리교사 피정지도, 성령세미나 강의, 재속프란치스코회 교육, 고등학생 문학특강을 했으며, 예비신자교리반까지 기꺼이 응했다. 이러한 많은 공로가 알려져 1977년 4월 24일 로마의 교황십자가훈장을 받았다.
우리말 살리기에 진정한 학자로서
김수업은 1939년 진주시에서 출생하였다. 경북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여, 대구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구비문학을 연구하며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1년 진주농림고등전문학교에 임용되었으며 1973년에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로 자리를 옮겼다. 김수업 교수는 ‘우리말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배달말학회, 모국어교육학회, 우리말교육현장학회 등에 참여했고, 우리말교육연구소장, 우리말교육대학원장 등을 맡았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심의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말꽃타령』 『배달말 가르치기』 『인문학의 새길을 찾기 위한 반성과 실천』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 『우리말은 서럽다』 등 수없이 많으며, 지역의 문화와 교육을 일으키는 데 진력했다. 지역사회를 위해 진주신문 발행인을 역임했고 진주오광대보존회, 삼광문화연구재단, 진주문화연구소 등을 이끌었다. 2003년 9월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2005년 1월까지 재임하였다. 2018년 6월 23일 7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해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국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 참고 〈마산교구40년사〉, 〈빗방울 김수업〉, 칠암동성당 홈페이지, 기타 김수업 저서 등
[2025년 6월 15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0 1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