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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20: 독일 레겐스부르크 상트 엠머람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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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3-25 ㅣ No.2351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20) 독일 레겐스부르크 상트 엠머람 수도원


레겐스부르크 신앙의 요람이자 주님의 학교 상트 엠머람 수도원

 

 

 

- 도나우강 건너편 북쪽에서 바라본 레겐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 교구 주교좌 성당인 상트 페터 대성당과 오른쪽에 1146년에 만든 석조다리가 보인다. 상트 엠머람 수도원은 중앙역과 대성당 사이에 있다.

 

 

독일 바이에른 중심부에 있는 레겐스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입니다. 도시의 역사는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179년 로마인은 레겐강이 도나우강으로 접어드는 곳에 요새 ‘카스트라 레기나’를 건설했고, 그 후 이곳은 중세 도시로 발전합니다. 레겐스부르크 지명도 여기서 유래하지요.

 

특히 레겐스부르크는 739년 성 보니파시오에 의해 바이에른에서 처음 교구가 설립되어, 초창기 교구와 수도원이 함께 그리스도 신앙을 꽃피워 나간 곳입니다. 오는 6월 분도출판사가 진행할 ‘간 김에 순례’의 수도 영성 프로그램(도나우·알프스 수도원 성지순례, 6/17~28)을 여기서 시작하는 것도 그때 신앙의 발자취를 좇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교좌 성당인 레겐스부르크 대성당도 중요한 곳이지만, 오늘은 그 신앙이 태동한 장소를 순례하려 합니다.

 

 

- 상트 엠머람 수도원 성당. 레겐스부르크 베네딕토회 제국수도원으로 739년 순교자로 공경받는 성 엠머람 무덤 위에 세워졌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으로 지정됐고, 현재 교구 본당으로 쓰고 있다. 출처=shutterstock

 

 

성 엠머람이 뿌린 신앙의 겨자씨

 

레겐스부르크역을 나서면 중세 도시의 정취가 가득합니다. 멀리서 들리는 대성당 종소리와 도나우강의 선선한 공기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내 넓은 공원이 펼쳐지는데, 서쪽 끝에는 투른·탁시스 가문의 상트 엠머람성이 있습니다. 원래 1803년 세속화 조치 전까지 성 엠머람에게 봉헌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도나우강 일대 신앙의 요람이자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성 엠머람은 7세기 프랑스 아키텐지방에서 바이에른으로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선교 주교입니다. 7세기 말 「성 엠머람의 전기」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당시 바이에른 공작의 딸이 주교에게 혼전 임신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녀가 가문의 명예 훼손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자, 주교는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니 아이의 아버지라고 둘러대도록 이르고는 로마 순례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격분한 공작의 아들에게 붙잡혀 사다리에 매여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순교하지요. 그가 묻힌 아쉬하임에는 40일 동안 비가 구슬프게 내렸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공작은 주교의 유해를 레겐스부르크로 이장하는데, 유해를 실은 뗏목이 이자르강을 지나 도나우강에 접어들자마자 기적처럼 강을 거슬러 올라가 레겐스부르크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레겐스부르크교구가 설정된 뒤인 752년 가우발트 주교는 성 게오르크 성당에 안치되어 있던 엠머람 주교의 유해를 수도원으로 옮겨 모신 뒤 그 위로 지금의 성당을 짓습니다. 이때부터 수도원은 상트 엠머람 수도원이라고 불립니다.

 

 

- 성 엠머람 수도원 성당 제대(1669년). 제대 아래 성해함에 유골이 모셔져 있는데, 부서지고 심하게 고문당한 흔적이 있다. 성 엠머람의 생애를 그린 벽화와 천장 프레스코화는 아잠 형제의 작품이다.

 

 

- 수도원 성 볼프강 소성당(위)과 성 볼프강 성해함(아래). 성 볼프강 주교는 교구민의 사랑을 크게 받은 목자이자 수도자로 사후 약 60년 만인 1052년에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올랐다. 레겐스부르크 도시와 교구의 수호성인이다.

 

 

수도원 개혁을 이끈 성 볼프강 주교

 

멀리서부터 르네상스 양식의 6층으로 된 63m 종탑의 웅장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외벽과 출입문은 단순하지만 수백 년 역사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이웃의 화려한 성과 대조가 되어 세속을 벗어나 하느님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성당 안은 이곳이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 성 엠머람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측면 벽에는 성인의 생애가 그림책처럼 펼쳐져 있고, 고개를 들면 천장 프레스코화에는 천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랑 양쪽 벽의 화사한 스투코와 조각상, 바로크 양식의 주제단까지, 그 화려함과 디테일에 감탄할 뿐입니다. 가대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1052년에 봉헌된 지하 소성당으로 제대에 레겐스부르크의 성 볼프강 주교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구장의 무덤이 주교좌 성당인 상트 페터 대성당이 아니라 왜 수도원에 있을까요? 그건 739년부터 975년까지 상트 엠머람 수도원 아빠스가 교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적 결합은 교구와 수도원 두 교회 기관이 초창기 선교란 목적 아래 단일대오였음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은 739년 초 보헤미아 선교 전초기지로 캄뮌스터 수도원을 설립하는 등 도나우강 넘어 슬라브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섰습니다. 972년에는 제국수도원으로 승격되고, 프라하 교구를 설립합니다. 성 엠머람이 뿌린 신앙의 씨가 레겐스부르크에서 꽃을 피우고 보헤미아에서 열매를 맺은 겁니다.

 

 

-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소년소녀합창단 ‘돔슈파첸’. 975년 초 성 볼프강 주교가 전례를 준비하고 성소자를 모으기 위해 세운 대성당 학교의 ‘스콜라레’가 기원이다. 2022년부터 소녀들도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중세 이후 많은 순례자가 찾는 성지

 

성 볼프강 주교는 재임 중 클뤼니·괴르츠 수도원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바이에른과 알프스 지역 수도원 개혁을 주도합니다. 성직자 교육과 영성 수련을 장려했기에, 수도원 도서관과 필사실을 짓도록 하고 수도원 학교를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상트 엠머람 수도원의 자치를 위해 독자적으로 아빠스를 두어 수도원장과 주교의 인적 결합을 분리하고 교구 운영에 전념했습니다. 이 기간 수도원에서 「하인리히 2세의 성사 전례서」 「우타 복음서」가 제작됐는데, 세밀화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이후 레겐스부르크가 루터교 도시가 되면서 수도원의 입지는 줄어듭니다만, 1625년 바이에른이 가톨릭 지역으로 바뀌면서 수도원은 다시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수도원 아카데미는 뮌헨 바이에른 아카데미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고 합니다. 1731년 아빠스들은 제국 제후의 지위로 승격됐습니다. 덕분에 수도원은 지금처럼 멋진 바로크 옷을 입게 됐지만 1803년 세속화로 수도원이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성 엠머람·성 볼프강을 모신 상트 엠머람 수도원은 중세 많은 순례자가 찾는 성지였습니다. 현대인은 프랑크 출신인 엠머람 주교의 죽음을 당시 세력 관계, 궁정 암투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합니다. 바이에른의 독립이 커 나가던 시기에 프랑크 왕국 지배에 대한 반발 또는 두려움이 상징적으로 드러났다는 거죠. 하지만 중세인에게는 그리스도처럼 약자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목자의 모습이 더 다가왔을 겁니다. 위대한 자선가로 불리며 사랑받던 성 볼프강도 모함에 묵묵히 교구에서 물러나 잘츠부르크 근처 호숫가에서 은수자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런 성인의 삶이 지금도 순례자를 끌어당기지 않나 생각합니다.

 

 

<순례 팁>

 

※ 뮌헨·뉘른베르크에서 열차로 1시간~1시간 30분 소요. 중앙역에서 상트 엠머람 수도원·레겐스부르크 대성당·도나우강 석조다리까지 도보 10분.

 

※ 상트 엠머람 수도원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18:00 (화·수·토).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주일 10시 미사에 참여하면 돔슈파첸의 성악 연주를 들을 수 있다.

 

※ ‘간 김에 순례’ 순례 및 영성 지도 문의 : 분도출판사 김성찬 신부(010-5577-3605)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3월 23일, 차윤석 베네딕토(전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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