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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저는 믿나이다19: 초대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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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3-25 ㅣ No.5503

[저는 믿나이다] (19) 초대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


황제 숭배와 밀교 · 미신 성행에 맞서 복음 선포한 교회

 

 

- 사도 시대 교회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성행하던 황제 숭배, 밀교 의식, 가정 내 미신 등 각종 우상 숭배의 유혹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삶으로 증거했다. 사진은 페르가몬 트라야누스 신전 유적. 구글 캡처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그리스도교는 1세기 말 팔레스티나 지역은 물론 시리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일부, 갈리아(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일부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로마에서는 교회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토록 짧은 시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로마 제국이 통일돼 있었고, 둘째,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셋째, 로마 제국 전역에 깔린 도로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지리·사회 문화 환경보다 종교 환경이 그리스도교 선교와 성장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합니다. 당시 종교 환경은 황제 숭배·밀교 의식·가정 미신 성행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이러한 배경은 사실 복음 선포에 가장 큰 장애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장애들을 삶으로 잘 극복하면서 교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로마의 황제들은 제국 내 수많은 민족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수단으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황제를 세상 구원자로 여겨 그에게 제사를 지냈고, 주화에 황제의 초상을 새겼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저술할 시기에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는 자신을 ‘주님이요 신(domonus et deus)’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자신을 ‘신들의 아버지’(도미티아누스)로 숭배하게 하고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상을 자신의 흉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신의 어머니’로 선포했습니다. 그녀의 주화는 왕홀을 손에 들고 왕관을 쓴 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데메테르 여신의 모습에 ‘신성한 카이사르의 어머니’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를 결코 신으로 받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황제 숭배에 맞선 초대 교회의 흔적을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요한 묵시록은 황제 숭배가 성행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상황을 보여줍니다.(묵시 1―3장) 당시 페르가몬은 로마의 여신과 황제에게 신전을 봉헌한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에페소 역시 페르가몬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리는 거대한 신전을 지었습니다.

 

사목 서간은 스스로 신이라 하는 세속 황제에 맞서 하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내는 신앙 고백을 관용어처럼 표현합니다. 일례로 티토에게 보낸 서간 2장 13절을 들 수 있습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에서 그리스도 대신 황제를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 제국에선 밀교 의식이 성행했습니다. 밀교의 사제들은 마법을 행하거나 환각에 취해 무절제한 광란의 제의를 거행했습니다. 당시 미트라스를 최고 신으로 숭배하던 밀교에선 생산력을 늘린다며 황소를 죽여 피를 나눠 마셨습니다. 또 일부 밀교에서는 무아경에 빠지기 위해 자기 몸에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채찍질하고 칼로 자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밀교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성찬 예식은 밀교의 제례 의식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했습니다. 전례 인식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들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거나 하는 것은 단지 동방에서의 공통된 종교적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각 가정과 가문에선 각종 미신이 행해졌습니다. 집안 곳곳에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을 모셔다 놓고 기름을 바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공공 축제에 참여하거나 이교도의 집을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상 숭배와 관련된 직업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교회는 황제 숭배를 공공연히 해야 하는 정치인·교사·신상을 만들거나 신전 벽화를 그리는 조각가나 화가는 물론 사람을 죽이는 군인과 검투사 등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직업을 포기해야만 세례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돼 당시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국이 없는 무리’ ‘인간 혐오자’라 비난하며 반사회적 사람으로 여겨 이교인과 유다인 다음의 가장 하층민으로 취급했습니다.

 

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혐오와 우상 숭배에 물들 모든 위험 속에서도 더더욱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교도들, 이방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 가정,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를 일구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땅끝까지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서 이어받은 가르침과 신앙을 교회는 충실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마음만을 지니고 있듯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진 듯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전수합니다.”(성 이레네오 「이단 논박」 1,10,1-2)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3월 23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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