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9일 (토)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성경자료

[신약]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12: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3-25 ㅣ No.7962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12)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 고대 필라델피아 성 요한 교회 유적. 출처 위키미디어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 고대 필라델피아 성 요한 교회 유적. 출처 위키미디어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25년 3월 23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3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