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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영화관: 희망의 순례자 - 말 없는 소녀(The Quiet Gi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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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특집] 희망영화관 : 희망의 순례자
희년을 맞아 서울주보는 희망을 주제로 다양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희망 영화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희망의 가치를 다양한 측면에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희망의 다양한 속성을 제시하고, 서사 안에 이를 잘 담아낸 영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을 보여주는 영화와 함께 희년을 보내보시면 어떨까요?
아직은 이른 봄 인적이 드문 한강공원 물골에 다다랐을 때, 어두움 한가운데서 수변의 단구형 지형의 돌 위에 야광체의 두 눈을 가진 생명체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습니다. 수달이었습니다. 거대 도시 한 복판에서 1급수의 수질에서만 서식하는 수달을 만나리라고는 가히 상상도 못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야생의 그 생명체가 도심의 저녁 산책을 즐기던 낯선 저와 눈이 마주치고는 바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3초간의 시선의 교감이 이뤄진 후, 마치 자기가 갈 길을 가겠다는 듯이 수변으로 몸을 담그고는 유유히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옆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 경이로운 시선의 교감을 증거해 줄 목격자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올라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저는 사라져 가는 수달을 향해 가만히 서서 어떤 존재와 처음으로 ‘살아있음’에 대해 서로 경축하는 의미로 고요히 오른손을 치켜들고 가볍게 몇 번 인사하듯 흔들었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각자의 생명체에 마음을 다해 서로의 시선과 마주하려는 태도는 비록 저에게서는 우연한 일로 벌어진 선물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이 ‘타자의 시선과의 응시’를 자기 삶의 가치로 여기기도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인 클레어 키건(Clarie Keegan)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아일랜드 영화 〈말 없는 소녀〉는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어떻게 타자와 시선을 교감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자신의 목소리를 미처 갖지 못한 존재들을 가끔, 아니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렇듯 목소리를 갖지 못한 존재들은 대부분 유력하지 못하고 또한 그러기에 숨은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재의 수요일 전례를 통해 복음으로 들었던 마태오복음 6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숨어계신’이라는 말은 원래 ‘봉인되다’라는 성경 원문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봉인된 시선 가운데 머무시는 하느님을 찾는 행위의 첫걸음은 우리 시선에서 사라진 존재들과 마주함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영화 <말 없는 소녀>는 소녀의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들과 관계 회복을 꿈꾸게 해 줍니다. 아울러, 우리를 양육한 힘들이 단순히 가족이라는 생물학적인 관계를 훨씬 초과하여 우리 자신을 인격으로 키운 모든 존재들을 ‘아빠’라는 호명으로 새롭게 정립해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열고 너무나 미약하고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아 소홀하기 쉬운 숨어있는 존재들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교회는 ‘자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순 시기를 살며 남을 돕는 행위는 우리의 자비심을 남에게 드러내는 행위를 넘어서서 봉인된 우리의 고결한 마음을 비로소 열어 타자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되는 나아감입니다. 이렇게 타자를 향해 시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홀연히 마주하게 되는 어떤 숭고한 정신을 조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나 아닌 존재에게서 느끼는 본연적인 설렘을 동반한 경이로운 열림, 희망 말입니다.
[2025년 3월 23일(다해) 사순 제3주일 서울주보 4면, 김상용 도미니코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교수)] 0 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