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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수원교구 성당 순례12: 은이성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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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1-15 ㅣ No.1164

[수원교구 성당 순례] (12) 은이성지 성당


김대건 신부 사제품 받은 ‘김가항성당’ 주요 자재 가져와 원형 복원

 

 

- 은이성지 성당. 정문 위로 중국에서 성당을 일컫는 천주당(天主堂)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승훈 기자

 

 

380년 역사를 지닌 성당

 

은이성지 성당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성당 정문 위로 천주당(天主堂)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문구만이 아니었다. 건물의 형태도 중국식이고 지붕의 기와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기와가 올라가 있었다. 380년 전 중국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성인을 기억하는 성지에 왜 중국식 성당이 세워졌을까. 이 성당의 옛 이름은 김가항(金家巷)성당이다. 1644년 중국 상하이에 있던 중국 전통 양식의 큰 주택을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 이 성당의 시작이다. 이 유서 깊은 성당은 중국 난징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되면서 증축을 거쳤고,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이 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성당은 그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을 재현하기만 한 성당이 아니다. 중국에서 철거된 김가항성당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성당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김가항성당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교구는 2001년 김정신 명예교수(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를 비롯한 전문가를 현지에 파견, 성당을 정밀하게 실측했다. 교구는 이렇게 정밀한 도면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2001년 3월 25일 마지막 미사를 끝으로 김가항성당이 철거되자 성당에 사용된 주요 자재들을 은이성지로 가져왔다.

 

교구는 은이성지에 김가항성당을 복원하고자 계획했지만, 교통·환경 영향 평가 등을 이유로 복원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은이공소 터를 매입하면서 복원 작업에 착수, 2016년 복원을 완료했다.

 

 

- 은이성당 내부. 이승훈 기자

 

 

교구는 중국 상하이의 김가항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기둥 4개와 보 2개, 동자주 1개 등 철거 당시 가져온 목자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심지어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차례에 걸쳐 증축한 흔적까지도 복원해 380년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건축면적 540㎡에 불과한 성당은 220명가량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다. 그러다 보니 복원이 진행되기 전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성당을 넓혀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대한 옛 모습을 살려서 복원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380년의 역사가 이 성당을 통해 이어질 수 있었다.

 

 

- 은이공소터에는 한 사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이승훈 기자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기억하는 공간

 

은이성지 성당이 복원해 낸 것은 비단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한 성당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건물에 있었던, 그리고 이 자리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성당 오른편에는 물방울을, 그리고 성령의 불을 떠올리게 하는 철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 조형물에는 한 사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소년이었던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은이공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이다. 은이 교우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김대건 신부는 성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으로 떠났다. 

 

성당 내부에 들어오니 옛 김가항성당에 자리하고 있었던 그 기둥과 보가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세월로 목재의 색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 목재들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니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던 김가항성당의 풍경이 절로 그려졌다. 제대 앞에 엎드리고, 또 무릎 꿇고 안수를 받았을 청년 김대건 신부는 우리가 보는 이 모습의 성당을 보고 있었을 터였다. 김가항 성당은 은이 교우촌에서 중국으로 떠난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이어주는 공간이었다.

 

 

- 은이성지 성당 내부 제대. 이승훈 기자

 

 

성당 제대 벽면에는 나무로 된 제대가 설치돼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하던 제대의 형태다. 이 제대 또한 중국에서 사용하던 옛 제대의 모습을 고증해서 제작됐다.

 

제대를 바라보니 김대건 신부가 집전했을 미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됐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활동할 당시에는 벽면에 설치된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주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활동한 짧은 사목기간 동안 이곳 은이를 찾아 미사를 봉헌했다.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찾기 위해 서해안의 섬들을 조사하러 갔다가 박해자들에게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곳도 은이공소였다.

 

제대 오른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 교우촌까지 옮기던 길목에 은이공소가 있었다. ‘삼덕고개’라 불리는 이 길은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며 걸어온 길이다. 유년시절에서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에서 사제서품, 사제로서의 사목과 순교에 이르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생애가 은이성지 성당에 담겨있다.

 

 

- 은이성지 성당과 김대건성인상.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5년 1월 12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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