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5: 전통 상장례 (히) |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5) 전통 상장례 (하) 십자가와 성경 든 복사단과 사제 뒤엔 성당 묘원으로 향하는 행상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상여’,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상주의 지위에 따라 상여 모양 달라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전통 상장례에 지관(地官)의 역할이 큰 것에 놀라워한다. 지관은 음양오행설의 풍수에 기반해 집터와 묘터를 정하거나 길흉을 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시대부터 활동했고, 조선 왕조에서는 지관을 과거로 선발해 전문적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계층에 풍수가 성행했으며 과거를 통해 선발 양성된 이를 지관이라 했고, 민간에서 생업을 겸하며 풍수를 보는 이를 지사(地師)라 구분했으나 일반적으로 지관이라 통칭했다. 풍수가·풍수·풍수장이는 지관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장례일을 잡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을 고려한다. 첫째는 친족 초대 의무다. 그들이 올 수 있는 날로 장례일을 잡아야 한다. 둘째는 지관이다. 지관이 먼저 묏자리를 정해야 날을 잡을 수 있다. (⋯) 유족이 부른 지관의 임무는 막중하다. 그는 패철 등을 활용해 묏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선산을 소유하고 있다. 부유한 문중의 선산은 꽤 멀다. 보통 망인을 선산에 묻는 것이 관례지만 이때도 지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동의하든 다른 묏자리를 찾든 결정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이는 어려운 일이라 오래 걸릴수록 지관의 몸값이 치솟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4~325쪽)
지관이 정해준 장례일이 되면 여섯, 여덟, 열여섯 혹은 스물네 명의 상여꾼이 집 앞에서 붉고 푸른 색색의 종이로 상여(喪轝)를 장식하며 출상 채비를 한다. 고인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인 상여는 크게 거(車)와 여(轝)로 나뉜다. 거는 바퀴를 달아서 이끄는 방식이고, 여는 어깨에 메는 방식이다. 거에는 말이 끄는 윤거(輪車)와 소가 끄는 상거(喪車)가 있다. 왕의 종친이나 사대부가 죽으면 주로 윤거를 사용했고, 장지가 멀어 상여꾼을 구할 수 없을 때 상거를 사용했다. 민가에서는 소여(小轝)만 상여로 사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고 인지하는 상여다.
상여는 상주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 지위가 있는 이들은 상여를 다층화하고 그림과 각종 장식물을 빈자리가 없을 만큼 빼곡하게 붙이고 달아 꽃상여를 만들었다. 상여가 크고 화려할수록 유교적 효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상여에 십자가와 성경 구절을 새겼고, 불자들은 만(卍)자를 넣어 외부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알 수 있도록 표현하기도 했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행상’,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황해도 청계리 출상 직전 상여 촬영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출상 직전 상여를 촬영했다. 건장한 10명의 상여꾼이 상여를 멨다. 상여 뒤에는 기품있는 상주와 상주 가족들, 일가친지들이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상여를 뒤따를 채비를 하고 있다. 상여는 소박하다.<사진 1>
“장례 행렬이 출발한다. 청홍색 종이 초롱이 선두에 서고, 향도 격인 상복 차림의 주례자가 지휘봉을 들고 우뚝 솟은 상여 앞에서 걸어간다. 상여는 휘장으로 둘렀다. 관은 그 아래 있다. 상여꾼들은 관대 아래 횡목에 매단 끈을 어깨에 걸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상엿소리의 리듬을 타면서 춤추듯 걷는 걸음이다. 때로는 숫제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갈 길이 멀다. 요령잡이와 상여꾼들은 최대한 에둘러 먼 길을 잡는다. 장례 소요 시간으로 견적을 내기 때문이다. 장지가 너무 가까워 큰 벌이가 안 되겠다 싶으면 별짓을 다 해 시간을 끈다. 개울을 건널 때마다 상제들에게 돈을 요구한다. 힘들면 멈추고 돈을 주면 다시 간다. 장지까지 당일에 못 갈 때도 많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8쪽)
베버 총아빠스는 장례 행렬을 1911년 황해도 청계리<사진 2>와 1925년 함경남도 내평<사진 3>에서 촬영했다. 둘다 가톨릭 교우의 장례 행렬을 촬영했지만 1911년 청계리 사진은 우리 전통 풍속을 잘 보여주고, 1925년도 내평 사진은 당시 교회풍의 장례 행렬을 보여준다. ‘사진 2’는 상여가 양편 초가를 빠져나와 마을 어귀에 당도한 장면이다. 주민들이 마을 어귀까지 나와 떠나가는 상여를 지켜보며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상주들과 문상객들을 위로한다. 상여 맨 앞에 올라탄 요령잡이가 종을 치며 구슬피 노래하며 앞길을 인도한다.
“노상에서 부르는 상엿소리는 실로 통절하다. ‘저승길이 힘들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 산 헐면 다시 오나?’ 요령잡이 둘이 요령을 흔들며 관 앞을 춤추듯 돌다가 이렇게 앞소리를 메기면, 다른 사람들이 뒷소리로 응답한다. ‘두 번 다시 아니 오네’. 다시 앞소리가 ‘바닷물 마르면 다시 오나?’라고 물으면 뒷소리는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두 번 다시 아니 오네.’ 이런 창의적 소리 메김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8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행상’,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내평 사진, 교회풍 장례 행렬 보여줘
‘사진 3’은 ‘사진 2’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상여 맨 앞에는 십자가를 든 복사단 행렬이 자리한다. 성경을 든 복사가 뒤따르고 그 뒤에는 중백의에 영대를 두른 카누토 다베르나스 주임 신부가 걸어가고 있다. 주임 신부 뒤에 자리한 상여는 고인이 그리스도인임을 알리는 십자가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상여가 내평본당 공동 묘원으로 들어섰음을 많은 나무 십자가 묘비가 알려준다. 상주들을 비롯한 행렬 참가자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 상여를 뒤따른다.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 오열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완전히 한몸이 되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라고 기도한다.
하관(下棺)은 집안에 따라 관 채로 안치하는 경우도 있고, 탈관해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인의 머리를 북향, 발을 남향으로 반듯하게 안치한 후 흙으로 메우는 것은 어디든 같다. 지방에 따라 하관 역시 지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지관은 하관 시간을 정하고 하관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할 띠를 미리 알려준다. 이 띠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약 하관 장면을 보게 되면 살을 맞아 병을 얻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해서 하관을 마칠 때까지 뒤돌아 서 있게 한다.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하관’,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는 ‘사진 3’의 하관 예식을 필름에 담았다.<사진 4> 상여에서 막 내려진 관에는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상여꾼들이 하관을 위해 광목 천을 감싸고 있다.
“벽을 친 묘혈에 하관이 진행되는 동안 인부들은 천천히 주위를 돌면서 땅을 밟아 다진다. 이때 지관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방법을 꿰고 있다. 관은 정확하게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 지관은 끊임없이 납추로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면서 그 방향으로 관을 움직인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측정하여 수평을 잡는다. 마침내 지관이 작업을 끝낸다. 종이를 바른 나무판에는 망인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것을 관 위에 놓는다. 관을 묘혈 석벽 사이에 정중히 모시고 그 위를 각목으로 덮은 다음 흙을 붓는다. 묘혈이 완전히 메워지면 인부와 상여꾼들이 땅을 밟아 단단히 다진다. (⋯) 원무를 추면서 흙다지기를 오래 거듭하는 동안 어느덧 높고 견고한 봉분이 쌓인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30~331쪽)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1월 10일, 리길재 선임기자] 0 3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