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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1: 독일 바이에른 알퇴팅 성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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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07 ㅣ No.2257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1) 독일 바이에른 알퇴팅(Altötting) 성모성지


‘검은 성모자상’ 모셔진 바이에른 신앙이 시작된 은총의 장소

 

 

 

- 알퇴팅 성모성지 카펠 광장과 은총 소성당. 뒷부분의 팔각형 세례 소성당이 원형이며, 15세기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앞측 본랑과 첨탑· 회랑을 확장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유럽은 성모 발현 성지 외에도 일상의 성지와 순례지가 많습니다. 중세부터 힘들 때마다 찾아와 성모님과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던 곳입니다. 독일 유학 시절 집 가까이나 답사 다녔던 길에 그런 순례지가 많았습니다.

 

요즘 출장이나 가족 여행으로 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많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잠시 짬을 내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중세 문화사의 관점에서 소개하며 필요한 순례 정보를 전합니다. 이 글이 삶 자체가 순례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분의 발이 서 있는 곳’(시편 132,7 참조)에 다가갈 기회가 되고자 합니다.

 

- 검은 성모자상. 몇 백 년 걸친 초와 향의 그을음으로 자연스럽게 ‘블랙 마돈나’가 됐다. 벽감의 은항아리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이 배출한 통치자들의 심장이 담겨 있다.

 

 

매년 100만 명 찾는 유서 깊은 성모 순례지

 

뮌헨 동쪽으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나오는 시골 마을, 그곳에는 언제든 성모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이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은총의 장소 ‘알퇴팅’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서 깊은 성모 순례지로 매년 100만 명이 찾아옵니다.

 

알퇴팅은 루르드·파티마와 같은 성모 발현 성지가 아닙니다. 1200여 년간 신자들의 성모 신심이 뿌리 깊게 내려 조성된 성지입니다. 역사상 세 명의 교황과 훗날 교황이 된 두 분도 이곳의 검은 성모자상을 찾아 도움을 청했습니다. 바로 옆 마르크틀암인에서 태어난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어릴 적 자주 순례하던 이 ‘정신적 고향’을 2006년 공식 사목 방문하셨습니다.

 

역에서 나와 건너편 돌길을 10여 분 걸으면 877년에 세워진 의전사제단 수도원 성당의 두 종탑이 보입니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성당으로 1000년 넘게 순례자를 보살펴온 곳입니다. 성당을 끼고 돌면 살짝 언덕에 푸른 잔디 광장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마을 중심인 카펠 광장은 여러 면에서 신비로운 장소입니다. 아침엔 한적하다가도 정오 무렵부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댑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여기에 왔지만, 모두의 목적지는 푸른색 지붕의 은총 소성당입니다.

 

 

696년 세례 받고 이교도 성지에 성당 세워

 

696년 테오도스 2세 공작은 이곳에서 잘츠부르크의 주교 성 루페르트에게서 바이에른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는 소성당을 세우고 성모자상을 모십니다. 왜 이런 시골에서 굳이? 사실 알퇴팅은 기원전 1300년부터 게르만족이 살던 오래된 곳입니다. 주변의 넓은 목초지와 빽빽한 숲 덕분에 사냥·목축하며 살기 적합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광장의 보리수 아래서 발굴된 유물로 보면, 이곳이 게르만족의 성지이자 중요한 안건을 논의하고 결정하던 ‘팅’의 장소였습니다. 공작은 이교도의 성지에서 세례를 받고 소성당을 세움으로써 이제 이곳이 하느님 자녀의 땅이라고 선언하려 한 것입니다. 또 알퇴팅은 중세 초기에는 ‘왕의 도시’라고 부를 만큼 요지였습니다. 인강과 잘차흐강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로마 시대부터 베네치아에서 잘츠부르크를 거쳐 레겐스부르크로 가던 교역로 요충지였지요. 그래서 카롤루스 대제도 이곳을 정복한 뒤 행궁을 세웠습니다.

 

은총 소성당에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회랑을 도는 순례자들이 보입니다. 과거 순례자가 놓고 간 십자가를 짊어지며 현재의 기적을 간구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천장과 벽에 내걸린 수많은 봉헌판에는 “성모님이 도우셨다”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가장 오래된 봉헌판(1501)도 보이는데, 과거의 기적들을 되짚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합니다.

 

순례의 열정이 으레 불타는 계기는 우리 삶에서 기적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1489년 가을, 개울에 빠진 지 한참 만에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이가 검은 성모자상 앞에서 되살아납니다. 얼마 뒤 수레바퀴에 크게 다친 여섯 살 아이가 낫는 두 번째 기적도 일어납니다. 크고 작은 치유의 기적이 계속 알려지면서 불과 몇 년 만에 알퇴팅 순례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알퇴팅 기적 소식 팸플릿(1490)도 나오는 등 인쇄술의 발전도 한몫합니다.

 

「우리 알퇴팅 성모님의 놀라운 기적」(1490). 인쇄술의 발전으로 알퇴팅의 여러 기적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필자 제공

 

 

알퇴팅 성모님 도움으로 여러가지 기적 체험

 

알퇴팅 순례 역사에서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성모님께 의지했고, 꾸준한 후원 덕분에 종교개혁과 그 최악의 결과인 30년 전쟁에도 알퇴팅의 성모 순례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왕가의 지극한 성모 신심은 은총 소성당의 벽감에 매장된 은항아리에서 잘 드러납니다. 황제 1명·왕 6명·선제후 3명 등 총 28명의 심장이 은항아리에 담겨 검은 성모자상 곁에 있습니다. 전통의 시작은 초대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1세로, 예수회 학교 출신인 그는 은총 소성당을 평소 자주 찾았습니다.

 

30년 전쟁 중에는 혈서를 써서 성모님의 도움을 청했는데, 기적처럼 패전 위기를 모면했고 뮌헨과 알퇴팅도 무사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뮌헨 마리아 광장에 세워진 성모 동상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죽어서도 성모님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심장을 성당에 매장한다는 게 꺼림칙하겠지만, 중세는 상상이 곧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 시대였습니다. 간절한 바람은 그렇게 실현됐습니다.

 

1681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유럽이 풍전등화였을 때에도 성모님께 의지했습니다. 선제후(選帝侯) 막스 에마누엘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검은 성모자상 앞에서 ‘알퇴팅 동맹’을 맺고 싸웁니다. 1683년 이들은 빈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해 그리스도교 세계로의 진격을 최종 저지합니다.

 

알퇴팅에 순례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광장 주변의 카페와 성물 판매점, 뒷길의 호텔, 식당가는 여느 관광지처럼 관광객으로 북적댑니다. ‘호프둘트’ ‘수도원 시장’ ‘틸리 시장’ 등 전통 축제가 열리면 카펠 광장은 축제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도 순례의 한 부분입니다. 알퇴팅의 분위기가 여느 성지와 다른 건 그런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미묘한 조화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게 알퇴팅이 주는 독특한 경험이자 매력일 겁니다.

 

 

<순례 팁>

 

※ 뮌헨·레겐스부르크·잘츠부르크에서 차로 1시간 10분, 기차(RB·RE)로 뮐도르프에서 갈아타서 약 1시간 30분 소요. 20분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긴 성곽을 지닌 부르크하우젠성이 있다. 1일권 바이에른 티켓 추천!

 

※ 은총 소성당과 검은 성모자상·콘라트 성인 유해가 모셔진 성 콘라트 성당,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성당과 틸리 소성당. 아이와 함께라면 순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마리엔베르크 입체모형 전시관까지.

 

※ 은총 소성당은 매일 오전 5시 30분~오후 8시까지 열려있으며, 오전에 매시간 순례자 미사가 봉헌된다. 고해성사는 매일 오전 성 안나 바실리카, 오후 성 막달레나 수도원 성당.

 

 

차윤석 베네딕토(전문번역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사회평론에서 어린이도서·단행본을 총괄했다. 「분도 통사」 편찬에 참여했으며, 「교양으로 읽는 용선생 세계사」(1-15권)를 기획·집필했다. 번역서로 「트리스탄」(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그리스도교의 오후」, 「요한 카시아누스의 참된 자유」 등이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1월 3일, 차윤석 베네딕토(전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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