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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8) 해방시기 한국 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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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 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8) 해방시기 한국 천주교회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해방 맞아… 교황청, 가장 먼저 독립 승인
- 「가톨릭청년」 5권7호(1947년 10월 1일 간행)에 실린 한국에 도착해 환영받는 초대 주한 교황사절 ‘하느님의 종’ 패트릭 번 주교.(왼쪽에서 세 번째) 재단법인 현담문고 제공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 ‘고유서’ 발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날은 성모 몽소 승천 첨례일(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믿을 교리로 반포된 것은 1950년이지만 교회는 벌써 6세기에 ‘성모님의 잠드심(Dormitio)’이라는 이름으로 성모 승천을 기념하고 있었다.
- '하느님의 종'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J. 번 주교.
국가가 해방을 맞이하듯이 우리 교회도 해방을 맞이했다. 금지된 성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있었고, 한국어로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성당의 종(鍾)이 공출될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신자들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거나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는 8월 17일 신자들에게 경솔한 행동은 삼가고, 정당한 정부가 한국에 자리 잡을 때까지 기도하자는 내용의 고유서(告諭書)를 발표하였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성모님을 주보(主保)로 모시며, 그 전구에 힘입어 새로운 광복의 역사로 나아갔다.
해방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6개의 대목구·3개의 지목구·1개의 자치수도원구가 있었고, 11만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당시 인구에 대비해 약 1% 미만이었다. 신자 수는 적었지만, 성직자와 신자들 모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새 출발을 시작했다. 당시는 미 군정 시기이므로 노기남 주교는 9월 13일 군정사령관 존 하지(J.R. Hodge, 1893~1963) 중장의 고문인 나이스터(Nister) 준장의 부탁으로 군정 측과 협력할 한국인 지도자 60명을 추천했다. 또 9월 26일 순교복자 첨례일에는 세계 평화 회복을 위한 감사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봉헌했다.
교황청, 한국 독립 승인하며 교황사절 임명
1947년 교황사절로 임명된 패트릭 번 신부는 10월 9일 입국해 12일 명동성당에서 교황사절 환영회를 했다. 이는 한국의 독립을 교황청이 가장 먼저 승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어 1949년 4월에는 교황청이 정식으로 한국을 승인하는 동시에 교황사절 번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때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대통령 신임장과 한국 주교단의 서한을 가지고 비오 12세 교황을 알현했고, 4개월 만에 교황청은 대한민국을 승인한 것이었다. 장면은 1949년 2월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됐다.
- 1948년 10월 26일 교황사절 번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내외빈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한편 교회 내에서는 1946년 9월 16일에 ‘조선순교복자현양회’가 재발족됐다. 윤형중 신부에 의해 일제 강점기 때 준비했지만, 일제에 의해 출발하지 못하고, 해방 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현양회는 순교복자 79위에 대한 공경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소중한 전통인 순교 신심을 키워나가며 유물들을 수집하고 찾기 시작했다. 그 해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러한 특별한 시기에 맞추어 방유룡(方有龍, 안드레아, 1900~1986) 신부는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설립했다.
또 노기남 주교는 1947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 37주년 대례(大禮) 연미사를 봉헌했고, 해방 직후 귀국한 안 의사 가족에게 명동성당 안에 있던 가옥을 거처로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지원했다. 아울러 병원·진료소·고아원·양로원 등 사회사업을 위한 기관도 설립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돕도록 했다. 폐간되었던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등 교회 잡지를 복간하고 교회 서적 간행사업도 활발히 시작했다.
일제 말기에 중단되었던 초등 공립학교 교육이 재개되자 계성초등학교·계성여자중학교·동성중학교 등 초등·중등 학교가 정비됐다. 1947년에는 ‘천주공교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하여 ‘성신대학’으로 인가받았으며, 소신학교를 ‘성신중학교’로 출발하여 정식으로 구분했다. 그리하여 성신중학교 예과 4년·고등과 2년, 성신대학 본과 4년·연구과 2년, 총 12년의 신학교육 기간을 그대로 유지했다.
1946년 1월 하야사카 주교가 선종하자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1894~1975) 신부가 대구대목구장을 대리했다. 1947년 7월에는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1905~1960) 신부가 전주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8월 패트릭 번 신부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고, 1948년에는 서울대목구에서 충청남도가 분리·설정되어 ‘충남지목구’를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게 됐다. 은퇴 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거주하던 라리보 주교는 충남지목구를 맡으면서 1965년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선교사의 소명을 다 했다.
- '하느님의 종' 제6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북한 교회 탄압과 성직·수도자 희생 잇따라
해방 후 서울 시내 본당은 종현·약현성당에서 계속해서 분리돼 한국전쟁 전까지 총 13개로 늘어났다. 서울 시내 본당이 급작스럽게 늘어난 이유는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신자들과 예비 신자들이 서울에 많이 거주함으로써 신자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의정부·김포·소사·여주·성남본당(현 수진동본당) 등 외부로 본당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분단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교회도 분열의 피해를 입고 있었다. 특히 북한 지역 교회는 소련군의 후원을 받는 북한 공산당의 지배 아래 다시 탄압을 받았다. 북한 당국은 가장 먼저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에 박해를 가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덕원신학교는 북한 당국에 의해 폐쇄됐고, 함흥교구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대한 탄압, 그리고 성직자·수도자에 대한 체포가 이뤄졌다.
이들 성직자와 수도자 가운데 많은 이가 구금과 ‘죽음의 행진’ 속에서 희생을 당했다.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주교가 됐던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1906~?) 평양대목구장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첫 종신자 서원 면담을 한 후 귀가하다가 납치됐다. 그 후 평양인민교화소의 정치범 감옥에 수용됐다는 소식만 알려진 채, 전쟁 중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와 덕원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을 진행 중이다.
성모 몽소 승천 첨례일에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는 깊은 반성과 성찰 없이 기쁨에 젖은 나머지, 북한 지역 박해와 함께 전운이 느껴지는 해외 정세를 알지도 못한 채 1950년 희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반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희년을 맞아 노기남 주교는 처음으로 사도좌 정기 방문(Ad Limina, 앗 리미나)을 위해 바티칸을 향해 떠났다. 그 사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교회와 복음을 위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고 증거했다.
- 1948년 10월 10일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집전의 사제서품식 후 평양 관후리주교좌성당 사제관 앞에서 평양교구 사제단과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중앙이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 평양교구 제공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 0 1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