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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30: 서만자 일대 박해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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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30) 서만자 일대 박해 상황 모방 신부와 은신한 토굴 발각돼 산 위 낡은 오두막으로 다시 피신
-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1835년 6월 17일부터 23일까지 일주일간 박해를 피해 토굴에 은신했다. 오늘날 서만자의 가난한 주민은 언덕 비탈에 굴을 파 주거지로 이용하고 있다.
총회장 “교우 밀고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박해의 위험이 닥치니 사람들의 됨됨이가 제대로 드러났습니다. 서만자 마을 지도자 두 명은 헌신적으로 모방 신부와 저를 도왔습니다. 저는 그들의 자비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닥친 위험만을 걱정하느라 자신들이 처한 위협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에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아닐 것입니다”라고 진정시켜줬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명의 지도자들과 달리 옆집 사람들은 저희와 자기네를 연결하는 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옆집 사람들은 아마도 저희가 바짝 추격을 당하면 자기네 집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도 서만자 지도자들은 모방 신부와 저의 은신처가 어떻게 발각될 수 있었는지 진상을 따졌습니다. 총회장은 교우 중 누군가가 밀고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왕 요셉이 남경에 맡겨놓은 저의 물품을 북경으로 운반하다 체포됐고, 그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서만자 은신처를 실토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총회장의 의심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고 많은 교우가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일까 봐 매우 걱정스러웠지만 서만자 총회장과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왕 요셉이 붙잡혔다면 경보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산동에 있는 샤스탕 신부가 이런 불행을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우리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페레이라 주교도 틀림없이 그와 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제 예감이 맞았습니다.
토굴에 은신한 다음 날인 1835년 6월 18일과 그 다음 날 저희에게 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첫째, 왕 요셉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떻게 됐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태수가 추적하고 있는 대상이 유럽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방 전체에 유럽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는 1835년 6월 26일 서만자에서 두 번째로 피신해 높은 산 위 낡은 오두막에 은신했다. 서만자는 지금도 북경 일대에서 유일하게 눈이 오는 지역일 만큼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마도 이들 산자락 중 한 곳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지냈을 것이다. 서만자 전경.
관할 벗어난 서만자 교우까지 잡아들여
이번 소동의 원인은 한 무관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승진한 그가 태수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갔답니다. 태수는 그에게 자기 지역에 반역자 백련교도들이 있는지 물었답니다. 이에 그 무관은 “아닙니다, 각하. 백련교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태수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중상모략했다고 합니다. 이에 태수는 선화부 관장에게 자기 관할 지역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과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이 무관에게 수사 임무를 맡겼다고 합니다. 무관은 그가 찾아낸 교우들을 모두 체포해 선화부로 압송했고, 심지어 관할을 벗어난 다른 지역까지 가서 교우들을 잡아들였답니다. 이번에 서만자 교우들을 잡아간 것이 그 대표 사례라 하겠습니다.
체포된 교우들은 잔인하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많은 교우가 고문에 굴복해 배교하는 것이 두려워 더는 고문을 당하지 않기 위해 관장에게 뒷돈을 주고 풀려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관리들의 탐욕을 일깨웠습니다. 관리들은 돈을 챙기기 위해 교우들을 더 혹독하게 고문했고, 더 많은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모든 선교사에게 잘 알려진 서만자의 한 경건한 노 교우도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역시 관장에게 4000프랑가량의 돈을 줬습니다. 그런데 관장은 그에게 “너는 배교도 하고 돈도 바쳐야 한다”며 더 심하게 고문했습니다. 이 경건한 증거자는 굳세게 버텼습니다. 서만자의 교우 여럿은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잃게 되는 것보다 재산을 잃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몇몇은 저희가 숨어있는 토굴로 피신해왔습니다.
토굴에 은신한 지 일주일째인 1835년 6월 23일 회장이 찾아와 모방 신부와 저를 토굴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회장은 저희가 살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저희는 토굴에서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이 토굴들은 산속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과는 다릅니다. 언덕 비탈에 사람의 손으로 파서 만든 주거지입니다. 거기에는 들판에 지어놓은 초라한 오두막들에 있는 것과 같은 작은 편의시설들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이 어두운 주거지에서 평생 사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공기는 축축하고 비위생적입니다. 출입구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항상 열려있는 것도 아니어서 환기가 어렵습니다.
1835년 6월 26일 모방 신부와 저는 두 번째로 피신했습니다. 이번엔 토굴이 아니라 산 위 높은 곳에 지은 낡은 오두막을 은신처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1주일간 이곳에서 숨어지내다 교우들의 연락을 받고 7월 3일 서만자로 내려갔습니다.
-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조제프 마르시알 물리 신부는 짧은 기간이나마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적잖은 도움을 줬다. 그는 초대 몽골대목구장 주교뿐 아니라 북경교구 책임자가 된다. 물리 신부.
라자로회 소속 물리 신부 서만자에 도착
저는 산속 오두막에 숨어 있으면서 연락원 한 명을 보내 왕 요셉을 찾도록 했습니다. 이 연락원은 길을 가다가 중국인 신부 한 명을 만났는데, 이 신부는 프랑스 라자로회 물리 신부가 머지않아 서만자에 갈 것이라고 저희에게 알리도록 했습니다.(필자 주- 조제프 마르시알 물리 신부는 1834년 6월 14일 마카오에 도착해 호북성에서 사목하다 북경교구에 속한 라자로회 선교 지역 곧 서만자로 옮겼다. 그는 1840년 몽골대목구가 신설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물리 신부는 7월 12일 서만자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만자보다 박해가 더 심했던 곳들을 무사히 지나왔습니다. 서만자로 오는 길에 한 교우집에 묵었는데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원들이 들이닥쳐 가택을 수색하고 교우들을 모두 감옥에 가뒀습니다. 조금 빨랐거나 늦었다면 물리 신부는 분명 체포됐을 것입니다. 그런 큰 불행이 생겼다면 박해가 더욱 심각하게 전개됐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물리 신부가 서만자로 온다는 소식을 알린 그 연락원이 왕 요셉을 찾도록 다시 보냈습니다. 소문으론 황제에게 바칠 쌀을 싣고 북경으로 오던 배 가운데 30척이 불탔다고 합니다. 이 화재로 300여 명이 죽었답니다. 이 말은 들은 서만자 교우들은 이내 왕 요셉이 그 희생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같은 불행이 그에게 닥쳤으리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서로 다소 먼 거리를 두고 항해하던 30척의 배가 어떻게 같은 화재로 침몰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3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운하 안에서 불타 죽도록 내버려두었는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행방불명 왕 요셉 찾아보도록 연락원 보내
그렇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 이 사건의 공식적인 발표, 이 화재 사건 시기와 일치하는 왕 요셉의 출발 시기, 그가 이 배 중 한 척에 탔다는 사실, 그에 대한 소식을 넉 달 반 동안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 제가 왕 요셉의 행방을 찾아보도록 보낸 연락원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정황 등을 종합해보면 그에게 그러한 불행이 닥치지 않았을까 걱정됐습니다. 저도 서만자 교우들처럼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와 조선 선교지를 위한 헌신의 희생자였던 왕 요셉이 화재 속에서 사망했으며 남경에 있던 저희 물품도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더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9월 3일 저는 왕 요셉이 살아있으나 심하게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1835년 7월 23일 저는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가 보내온 편지 묶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1~2년 전에 보낸 이 편지 묶음을 읽고 중국과 프랑스의 많은 이가 아직도 저희의 일에 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답신을 썼습니다. “저는 요동지방이 적어도 조선대목구에 맡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포교성성에 알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지방은 언제나 닫힐 것이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은 아마도 실패할 것입니다. 또 신부님께서 포교성성이 저희에게 필요한 모든 호의를 베풀어주도록 요청해주십시오.”(1835년 7월 27일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쓴 편지 중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8일, 리길재 선임기자] 0 2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