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법
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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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1)
교황청은 오는 10월 열리는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을 7월 9일 공개했다. 2021년 10월 개막, 2024년 2차 회기로 마무리되는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하느님 백성의 여정이다. 의안집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성공적인 시노드를 위한 첫걸음이다. 제2회기 의안집의 의미와 내용을 5회에 걸쳐 알아본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5월 2일 교황청 시노드홀에서 열린 세계 본당 사제 시노드 모임 중 사제들과 대화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시노달리타스를 바라보는 전망: 하느님이 이루실 온 인류의 충만한 구원을 향한 여정에서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 25,9)
흥미롭게도 제2회기 의안집은 이 성경구절로 끝나고, 이사야서 25장 6~8절을 직접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 구절의 말씀은 만군의 주님께서 이루실 모든 민족의 구원을 다룬다. 마지막날에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겨레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실 것이며,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 내시며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실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이 이루실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희망을 문헌 앞뒤에 배치한 것은, 의안집이 시노달리타스를 어떤 전망 안에서 보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의안집은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하나 되어 하느님의 이 구원에 대해 찬미를 드리고, 또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여정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이다.(의안집 마지막 문장 참조).
따라서 의안집은 단순히 ‘지금 여기서 우리가 제기하는, 혹은 관심을 두는 이러저러한 주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춰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모든 사람과 민족 안에 실현되는데 봉사하도록 부름받았음을 확인하면서, 이 백성 자신이 ‘어떻게’ 이 충만한 구원을 향하여 걸어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수행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떻게’에 대한 답이 바로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이 관점은 제2회기 의안집의 전체 내용을 포괄하는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전망은 시노달리타스를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로 부름받은 교회의 사명과 연결시키는 의안집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의 순환적 방식을 따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교회 여정의 ‘일부’인 제2회기
의안집은 시노달리타스를 하느님이 이루실 구원의 완성을 향한 교회 여정의 ‘스타일’로 본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지금까지의 시노드 과정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시노드 제2회기도 ‘결론’이라기 보다는 ‘끝나지 않는’ 이 교회 여정의 일부라고 이해한다.
이 작업문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 문헌 자체가 전 세계 하느님 백성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삶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2021년부터 단체, 본당, 교구, 나라별 주교회의, 대륙별 주교회의, 전체 총회 1회기 등을 거치면서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들었는데, 이 과정들은 직선이 아닌 순환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아래로부터’ 울린 하느님 백성의 소리가 경청되었고, 주교시노드 사무국은 ‘들은 것’을 각 지역교회에 다시 들려준 후 지역교회의 성찰과 생각을 다시 듣는 과정을 거쳤다. 전 세계 지역교회의 의견에 기반한 ‘대륙별단계 작업문서’나 ‘제1회기 종합 보고서’가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이것은 시노달리타스가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들음에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아래로부터’의 방향성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고 단순히 시노드의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위로부터의' 방향성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노달리타스 방식의 특징은 하느님 백성 구성원들 사이에, 그리고 그룹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순환성’이다. 이 순환적 과정 덕분에 제2회기 의안집은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삶의 자리와 각 지역교회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하여 깊은 인식과 존중을 표명할 수 있었다. 지역교회의 중요성은 의안집 3부에서 시노달리타스가 ‘구체적 형태’로 실현되어야 할 장을 다룰 때 특히 강조된다.
작업문서의 구성: 관계, 과정, 장
제2회기 의안집은 지금까지 ‘친교, 사명, 참여’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발행됐던 시노드 공식 문서들과 비교할 때, 그 구성에 있어 뚜렷한 변화가 있다. 서론과 결론 외에 본문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서론에서 지금까지의 여정 동안 발전한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이해를 요약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시노달리타스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나라 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회기 종합의견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은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더 잘 이해했고 그 가치를 알게” 됐던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의안집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 어떻게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제2회기 질문에 답하는데 필요한 5가지 기초를 설명한다. 1) 일치의 성사인 하느님 백성, 2) 시노달리타스 의미에 대해 공유된 이해들, 3) 다름 가운데 조화인 일치, 4)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곧 상호성의 쇄신, 5) 회심과 개혁으로 부름받음이 그것이다. 이 기초들 위에서 3부로 나누어진 본론에서는 각각 3가지 주제를 다룬다. 1) 관계들, 2) 관계들의 역동성을 지지하고 고무할 과정들, 3) 관계들이 구체화될 장들 등이다.
이전 문서들에서 제시된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개념들이 신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면, 제2회기 의안집의 핵심 주제인 ‘관계, 과정, 장’이라는 단어들은 시노달리타스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2회기의 의도에 맞게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관계들’을 다루는 1부는 주님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교회들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다룬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자체가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출발해, 의안집은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 주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구성원들이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가를 다룬다. 특히 은사와 직무의 관계, 직무자들의 역할, 교회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친교를 이룰 것인가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2부에서는 이러한 관계들이 구체적으로 또 역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한 과정들을 다루는데, 특히 양성,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식별, 결정 과정의 구체화가 소주제로 다루어진다. 특히 이 과정의 특성을 투명성, 책임성(accountability), 평가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부는 관계들이 그 다양성, 복수성, 상호 연관성과 함께 구체화되고 신앙고백에 뿌리내리는 맥락들을 살펴보는데, 여기에서 지역교회들, 교회의 일치, 그리고 교황의 역할 등이 다루어진다.
제2회기 의안집은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는 교회가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법적 변화가 요청된 것들은 무엇인지도 논의 주제로 제안한다. [가톨릭신문, 2024년 7월 28일,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2)
삶의 모습이나 행동은 가치관에서 나온다. 제2회기 의안집도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한 논의의 기반을 서문에서 다룬다. 이 부분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신학적 논의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본론에서 다룰 구체적 실천 내용을 준비한다. ‘기초들’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언급된다.
1) 하느님의 백성이며 일치의 성사인 교회 2)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에 대해 공유된 의견 3) 다름 가운데 조화인 일치 4)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호혜성 5) 회심과 개혁으로 부름받은 교회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에 대해 공유된 이해: 교회가 살아가는 ‘스타일’
의안집의 전망을 이해하기 위해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쉽지 않은 개념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에 기반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단어 자체가 너무 넓고 복합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삶과 활동’ 안에서 비로소 실제적 의미가 채워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수년간의 시노드 과정 동안 공통된 이해가 생겨났고, 의안집은 그것을 소개한다. 소개 방식 자체가 체계적이지 않고, 단순 나열식이기는 하다. 그래도 우리가 도달한 이해와 비교해 봄으로써, 시노달리타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제1회기 종합보고서는 하느님 백성이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는 교회, 덜 관료적이고 더 관계적인 교회”를 희망한다며 시노달리타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온 인류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명을 지향하기 때문에 교회적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함께 모이는 것, 상호 경청, 대화, 공동체의 식별, 성령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현하는 동의 형성, 그리고 분화된 공동책임성 안에서의 결정을 내리는 것 등을 포함한다.”(제1회기 종합보고서 1,8)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스타일’(6항)이고 그 기본은 경청이다. 경청은 단순히 ‘나 혹은 우리의 소리를 들어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 자체가 ‘들음으로부터’ 오고, 이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로마 10,17) 우리는 말씀을 전해주는 성경과 교회의 살아있는 성전(聖傳)을 경청해야 하고,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따라 가르치는 교도권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특히 교회를 살게 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게 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계시헌장 7항 참조)
그리고 성령께서는 신자들 안에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에 서로에게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의안집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들은 것만을 선포할 수 있다.”(6항) 경청은 서문에서 다루는 ‘기초들’ 중 하나인 회심과 개혁의 내용이기도 하다. 내적 변화 없이 외적 변화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청’이 시노달리타스의 의미 전체는 아니다. 경청이란 ‘함께 감’이라는 시노달리타스 여정에 있어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모습은 ‘들음’ 뿐만 아니라, 성찬례, 형제들의 친교, 교회의 공통된 사명, 곧 복음 선포 사명에 다양한 직무와 역할로 참여하는 데에서 드러나며, 이러한 참여가 보장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들에서도 표현된다.
- 의안집은 ‘시노드 교회’를 전체 인류 안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규정한다. 사진은 미국 위스콘신주 챔피언시에서 6월 16일 거행된 성체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행렬하는 모습. OSV 제공
시노달리타스, 일치의 성사인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
시노달리타스는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목표 수행을 위한 방식이다. 의안집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전체 인류 안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규정한다. 이것이 의안집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과 ‘일치의 성사’는 별개의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원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교회헌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 이 ‘연결됨’에 근거해 의안집은 ‘관계들’과 그 상호의존성, 호혜성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가 일치의 성사라는 표현은 교회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하느님 백성 구성원들이 일치의 ‘관계’ 속에서 ‘함께 살고 일하는’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때(표징), 교회는 온 인류를 그 일치로 초대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도구). 이것이 ‘일치의 성사’로서의 교회가 의미하는 것이다.
일치, 다름 속에 조화
일치 문제는 ‘다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와 직결된다. 의안집은 ‘다름’,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복음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자리, 문화 등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성장하기 위한 ‘열쇠’다(11항). 일치란 다름의 제거가 아닌, ‘다름의 조화’다.(10항-12항) 이 다름은 삶의 자리뿐 아니라, 구성원의 은사, 직무, 소명에서도 인정돼야 한다.
호혜성,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의 특성
제2회기 의안집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단연 ‘관계’이며 그 특성은 ‘호혜성’이다. 다름 속의 조화라는 일치 개념과도 연관된 이 호혜성은, ‘함께 감’뿐 아니라 상호 의존, 상호 성장을 지향한다.(14항) 특히 여기에서는 제2회기에서 다룰 여성 관련 주제들이 열거돼 있다.(16항)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여성들의 경험과 은사, 능력, 교회의 선에 기여할 수 있는 사목적, 신학적 그리고 영적 직관들을 공유할 수 있는 대화의 장 확대 2) 식별과 결정 과정에 여성의 참여 증진 3) 교구와 교회기관의 책임자 자리에 대한 여성의 접근성 확대 4) 여성 수도자의 삶과 은사에 대한 인식 개선, 그리고 책임자로서 일할 수 있게 하기 5) 여성들이 교회 기관과 신학교, 신학 학과에서 책임자로서 일할 수 있게 하기 6) 교회법적 절차에서 판관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가능한 여성의 숫자 늘리기
한편 의안집은 제2회기에서 여성 부제직에 대한 논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시간을 두고 신학적 성찰을 계속할 것임을 밝힌다. 이 주제에 대해 충분한 연구도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또 지역교회에 따라 찬반이 엇갈리기 때문으로 보인다.(17항)
또한 “남녀 평신도들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동안에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설교(predicatio)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요청됐다”(18항)고 언급한다. 설교라는 단어가 강론보다 폭넓게 쓰이고, 교회법(766조)에는 평신도들의 경우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라 성당에서 설교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전례 중 거행되는 설교는 강론(homilia)이라 칭하고, 강론은 교회 예배의 필수 요소여서 서품받은 이에게만 유보돼 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강론지침」 5항). 따라서 의안집의 표현을 평신도들이 미사에서 ‘강론할 수 있다’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설교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시노드가 이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시노달리타스, 공동체가 간과되는 개인주의와 개인이 소외되는 극단적 공동체 의식에 대한 대안
의안집은 시노달리타스 스타일이 인류에게도 영감과 통찰,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20항) 왜냐하면 개인주의의 팽배와 개인의 고립 속에서 상호 돌봄, 상호 의존, 공동선에 대한 공동책임성, 그리고 관계맺음과 관련해서,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줄 수 있는 답이다. 이는 또한 개인이 무시된 극단적 공동체의식 앞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경청하고 함께 가는 모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는,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로서의 사명을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가톨릭신문, 2024년 8월 11일,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3)
교회는 자신을 위해 있지 않다. 교회는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로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공동체이며, 복음선포의 명령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예배와 복음선포의 사명에서 제외된 그리스도인은 없다.
시노드 교회란 이 사명에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의 몫으로, 함께, 그리고 구성원 간 상호 관계 속에서 참여하는 교회이다. 구성원들이 어떤 관계 속에(1부), 어떤 과정을 통해(2부), 그리고 어떤 구체적 장들이 그 효과적 참여를 가능케 할지를(3부) 제2회기 의안집 본문에서 다룬다.
시노달리타스는 구성원 간 ‘관계’를 이루는 방법에 대한 것
경청, 의사결정에 관련된 조직이나 제도 마련에만 중점을 두고 시노달리타스를 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노달리타스에서는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가 더 근본적이다. 그래서 의안집은 1부 ‘관계들’의 첫머리에서부터, 시노달리타스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느님 사랑에 도달, 응답할 수 있는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방법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계들’에서 그리스도교 입문, 은사와 직무, 서품된 직무자의 역할, 그리고 지역교회들 간 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들의 원천, 모델은 삼위일체 하느님이다.(22항-23항)
성체성사,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델, 현현, 정점
시노달리타스의 기초는 세례성사로 인한 교회 구성원의 동등한 품위다. 동등성은 획일성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로서의 동등성이다. 그런데, 2회기 의안집은 이런 세례성사적 기초보다 성체성사에 더 집중한다.
처음부터(10항) 끝까지 성체성사가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역동성의 원천, 모델, 정점임을 역설한다. 성체성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은 시노드적 특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런 교회를 성장시킨다.(1부) 성체성사에서 모든 이가 다양한 직무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현존을 드러내고, 모두가 서로 구별된 형태로 받은 사명에 대한 공동책임성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성찬례에 모인 이가, 저마다의 몫으로 능동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찬례를 집전,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를 집전하고 계심을 성사적으로 드러내며, 신자들은 보편사제직으로 인해 ‘사제를 통하여 만이 아니라, 사제와 하나 되어 흠 없는 제물을 봉헌하면서 자신을 봉헌한다.’(전례헌장 48)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공통의 사명’에 저마다의 몫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이를 가리켜 ‘분화된 공동책임성’이라 한다.
성체성사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관계들을 돌보고 발전시키며 공고하게 하는 과정들의 원천, 정점이며(2부 머리말), 시노달리타스 양성이 이루어지는 가장 근본적 장이다.(55항) 성체성사의 강조는, 시노달리타스를 외적 활동이나 제도 수립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됨을 보여준다. 시노달리타스가 교회의 삶과 활동의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방법이 아니라 ‘교회적’ 방법에 대한 것이다.
- 성체성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은 시노드적 특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런 교회를 성장시킨다. 2015년 11월 1일 미국 아이다호주 성 예로니모성당에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모습. CNS
은사를 실현하는 첫 번째 장은 일상의 삶과 관계들, 상황들
교회 구성원이 어떤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갈 것인가는 각자 받은 은사와 직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된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니라,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이 각자 저마다 다른 길로 부르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의안집은 은사를 드러내는 것을 활동이나 조직, 단체에 한정시키는 것을 피한다. 은사는 일차적으로 일상적 삶, 가족 관계, 사회적 관계,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앞서 시노달리타스를 활동이나 조직 개편, 혹은 구조 변화로만 생각하는 것에 주의를 요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한편 은사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한다.
제도화된 혹은 제도화될 수 있는 직무들
보편사제직에 기초해 평신도의 다양한 직무에 대해 숙고할 필요성을 언급한다. 이미 자의 교서 「주님의 성령」과 「오래된 직무」에 따라 독서직, 시종직, 그리고 교리교사 직무가 평신도에게 부여됐다. 제도화된 이 직무들의 구체적 수행 방식은 합법적 권위가 정할 것이며, 교회의 삶과 지도에 관련된 직무들, 특히 이에 대한 여성 참여 문제는 신앙교리부와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 연구팀이 연구하고 있음을 밝힌다.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형태로서 경청과 식별의 직무가 언급된다. 이는 시노드적 방식의 경청과 식별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도 몇 가지 주의를 요청한다. 즉 그 직무들은 지역교회 상황에 부합하게 수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경청과 식별, 동반을 직무자의 몫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는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초대받은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34항)
주교직 · 사제직 · 부제직, 하느님 백성의 공통사제직 간의 상호의존성
신자와 성직자의 관계는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해 시노드 여정 초기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다. 의안집은 서품된 직무자들이 맺어야 할 관계의 특성을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룬다. 첫째는 권위를 피라미드 방식이 아닌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 안 다양한 직무자들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서품직무 곧 주교, 사제, 부제, 어느 한 직무도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다. 이들은 상호의존적이어서, 다른 직무자와 함께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품된 직무자들끼리만이 아니라, 보편사제직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과의 유기적 관계 안에서 직무를 수행한다.(37항) ‘상호의존성’, ‘호혜성’은 2회기 의안집이 교회 구성원 간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개념이다.
지역교회들 간 선물의 교환, 그리고 세상 안에서 친교의 성사
마지막으로 의안집은 구성원 간 관계성을 지역교회들 차원으로 확장한다. 여기에 작동하는 기초 개념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일치, 곧 ‘보편성’(catholicity)이다. 시노달리타스는 지역교회 내의 관계들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교회들과의 관계망을 통해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지역교회가 가진 고유한 ‘선물’들이 고려돼야 하며, 교회들은 이 ‘선물들의 교환’을 통해 하나인 교회, 친교를 이룬다. 교회의 이런 모습 자체가 세상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로서의 성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선물의 교환이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 비그리스도인들과도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이처럼 의안집이 제안하는 시노달리타스 실현은, 단순히 시노드적 절차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와 타자, 공동체, 다른 지역교회, 세상의 다양한 문화 및 종교와의 관계에서의 회심, 곧 관계적 회심을 전제한다. [가톨릭신문, 2024년 8월 18일,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4) 어떤 과정들을 통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되어갈까?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교회 구성원이 어떻게 함께 수행할 수 있을까? 의안집은 이 ‘어떻게’에 대하여 먼저 구성원 간의 상호의존적, 호혜적 관계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어 이 관계의 발전과 보장을 위해 필요한 과정을, 양성, 식별, 결정, 그리고 이 과정들에 있어야 할 투명성과 ‘설명 책임’(accountability)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제안한다.
양성의 근본적인 장, 성체성사
양성은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시노드 여정 내내 강조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이것을 마지막에서 다루었다면, 2회기 의안집에서는 첫 번째로 다룬다. 이는 “시노달리타스 실현 여부가 양성에 달려 있다”고 본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의안집은 양성 문제를 상황의 중요성, 경청 능력 양성, 성체성사, 양성 방식 등으로 나눠 다룬다. 이번 시노드가 지역교회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인식 없이는 복음선포가 어렵기 때문에, 의안집은 양성의 첫걸음을 각 지역교회가 속한 문화와 역사적 상황 파악으로 본 것이다.(53항) 그리고 그 상황에는 디지털 문화도 포함된다.(56항)
양성의 가장 근본적 장을 성체성사라고 명시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55항) 이는 2회기 시노달리타스를 활동이나 조직 개편으로만 축소하려는 위험을 의안집이 주시하면서, 그 ‘교회적’ 특성과 구성원 간 ‘관계적 회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의안집은 성체성사가 시노달리타스 실현의 원천이요 모델, 정점임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에서 성직자와 신자들은 각자의 몫으로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교회의 모습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도록 교회 구성원을 양성함에 있어서도 그 탁월한 장일 수밖에 없다.
- 의안집은 ‘자문’을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여길 위험을 지적한다. 현행 교회법에서도 결정에 있어 참으로 ‘우월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자문을 무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2016년 7월 세종시 정하상교육회관에서 대전교구 시노드 준비위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모두가 참여하는 통합적 양성
누구도 자족적이지 않고 누구도 공동체에 기여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경청해야 한다. 물론 구성원 간 경청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령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청은 사람들을 넘어, 하느님 말씀, 그리고 성령을 향한다. 우리는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의안집은 문화와 영성적 전통에 따라 방법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각 지역교회의 문화와 상황에 맞는 경청 방법을 생각하도록 초대한다.(54항)
양성의 내용에는 이론교육만이 아니라, 만남, 나눔, 협력, 공동 식별 능력을 키우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지성, 정서, 영적 측면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즉 ‘통합적 양성’이어야 한다. 의안집은 여기에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증진도 포함시킨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의안집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어떤 이의 양성에든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다른 구성원과 협력하는 법, 호혜적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57항) 특히 여성들의 참여 증진을 강조하고 있으며, 신학교육과정이나 신학교에서 남녀 평신도가 교수직을 포함한 직접적 양성자로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식별은 ‘교회적’이어야 한다
교회가 ‘하느님께 거룩히 예배드리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 실현 과정에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식별이 들어간다. 이 식별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출발점이요 준거는 하느님 말씀이다.(60-61항) 의안집은 이것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로써 식별을 단지 구성원 간의 상호경청으로만 축소할 위험을 피하게 해준다. 의안집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다음 여섯 가지 경로를 통해 들을 수 있다. 1) 개인적 묵상, 2) 말씀에 대한 탁월한 해석의 장인 전례, 3) 교회, 특히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과 실천들, 4) 사건들, 5) 창조주의 활동과 성령의 현존으로 채워져 있는 창조 세계, 5) 양심. 이런 면에서 교회 안에서의 식별은 참으로 ‘교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의안집은 인문사회학적, 행정적, 혹은 과학과 기술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동시에 이것들이 교회적 식별과정의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님도 강조한다.
분화된 공동책임성에 따른 결정 과정: 자문과 결정권
교회의 구성원은 각자 받은 은사와 능력으로 식별에 기여하면서 어떤 결정에 이르게 되는데, 결정 과정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 즉 하나는 식별과 자문, 그리고 협력의 공동작업을 통해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decision making)’이고, 다른 하나는 합법적 권위자에 의한 ‘결정행위(desicion taking)’이다. 의안집은 이 둘을 대립관계로 보는 것과 자문 과정 및 결과를 간과하는 것 두 극단을 염려한다. 교회 안에서 결정은 하느님 뜻에 부합할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 대한 순종 안에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두 과정은 함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에 근거해서 주교, 주교단, 교황의 결정 권한은 제거될 수 없다. 사실 이 권위는 다른 구성원보다 더 큰 책임을 진다.
의안집은 자문이 사회학적 의미로만 해석되는 것, 즉 ‘무시해도 되는’ 그런 것으로 여길 위험을 직시한다. 이미 현행 교회법에서도 결정에 있어 자문 과정을 의무적인 것으로, 그리고 참으로 ‘우월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자문을 무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교회법 127조 2항) 의안집은 현행 교회법에서 자문기구인 평의회의 권한을 ‘건의투표권’으로만 한정하는 항목이(예를 들어 514조) 자문의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수정을 제안한다.(70)
투명성과 ‘설명 책임’(Accountability)
투명성은 시노달리타스 실현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항상 언급됐던 것인데, 2회기 의안집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설명 책임’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 점이다. 이전 문헌들에서 드물게만 언급되었던 이 단어는, 본래 회사, 단체 등등에서 일이나 사업의 성패 결과에 대해 설명하는 책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의안집은 이 단어를 차용하면서도, 사회적이며 조직적 의미로 이해되는 것은 피할 것을 요청한다. 대신 이 단어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성경에서 찾는다. 코르넬리오에게 세례를 준 것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사도 11장), 의안집은 이것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취해야 할 ‘설명 책임’을 잘 보여준다고 본다.(74항) 투명성과 설명 책임은 재정, 성추행, 사목적 영역, 복음화 방법, 인간 품위 존중 방식 등등에 요청되는데, 이는 특히 권위 행사 방식과 연관돼 있다. 그리고 설명 책임과 투명성, 권위 행사에 대한 성찰은 ‘섬김’의 틀 안에서 이뤄진다.(74항) 또한 의안집은 교회 안에서 수행되는 직무 책임 수행 방식에 대한 정기적 평가를 위한 구조와 형태, 특히 주교회의가 지역교회의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투명성과 설명 책임의 과정 및 형태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4년 8월 25일,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특별기고]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의안집 이해하기 (5 · 끝) '어디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할 수 있을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이기 위한 구성원 간 상호의존적 관계, 그리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과정들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실현될까?.(의안집 3부) 분명히 교회는 ‘코린토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어떤 장소와 문화에 뿌리내리고 그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교회는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복음선포라는 사명을 수행하는 공동체이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자리 또한 그곳이다.
장(場), 물리적 공간 개념을 넘어서
의안집은 본당-교구-관구-주교회의-보편교회의 직선적 이해 방식을 극복하기를 요청한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이 질서에 따라 이루어져 있고, 필요에 따라 수행될 교회적 제도 개혁도, 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88항) 그런데도 의안집이 직선적 이해 대신 상호성, 혹은 상호내재성을 강조한 것은(3부 서론) 하느님 백성 구성원의 변화된 삶 자체가 지닌 공간적, 문화적 역동성 때문이다.
도시화와 세계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동으로, 과거처럼 생애 전체를 한 지역에서 보내는 이도 많지 않고, 주거지역과 활동지역이 다른 경우는 허다하다. 더욱이 디지털 문화의 확산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경험이나 개념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83-85항) 따라서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장에는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관계들이 전개되는 네트워크 환경도 포함된다.
지역교회의 가치, 그리고 하나인 교회
이번 시노드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 곧 다양성과 일치를 중요시한다. 지역교회의 고유성과 다양성 존중이 상대주의나 개별주의의 허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구원이 어떤 장소와 시간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적합한 경험들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되기 때문에 지역교회를 존중하고, 지역교회의 전례적, 신학적, 영적, 규범적 전통이 가톨릭교회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이고 유일하기 때문에 하나이고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친교 안에서 실현한다.
“문화의 다양성, 그리고 그 문화들 사이의 만남과 대화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험은 교회의 삶의 조건이지, 보편성에 대한 위협이 아니다.”(81항) 복음은 다양한 백성과 문화, 전통과 언어 안에서 표현되며, 이런 “형태의 다양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교회적 삶과 전례적, 사목적, 그리고 윤리적 표현들을 획일적으로 이해하지 않게 해준다.”(81항) 이 속에서 일치의 보증이 주교단과 교황의 역할이다.
- 다양성과 일치를 중요시하는 이번 시노드는 지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가톨릭교회 전체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3월 5일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 개회식에서 한국 주교단이 총회 안건을 검토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장, 특히 평의회
본당이나 기초공동체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이다. 본당 사제는 기도와 예배, 진리 증언과 봉사를 위해 부름받은 제자요 선교사로서 일하고, 수도자, 평신도, 신심 운동들, 사도생활단도 이 교회 실현에 참여한다.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는 장으로 의안집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평의회이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이 평의회를 사목활동의 계획과 실행, 평가를 위한 본질적 도구로서 그 가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랐다. 의안집은 현행 교회법이 정한 구조들은 시노달리타스 스타일에 더 적합한 형태로 개선할 수 있으며, 그 구조들이 ‘교회적 식별과 시노드적 결정 과정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에 대한 설명책임과 평가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는 교회로 나아감에 있어 ‘가장 뛰어난 영역들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91항)
특히 의안집은 평의회의 구성 및 작동 방식의 개선을 제안하는데, 구성원 다수를 주교나 본당신부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 공동체나 지역교회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뽑을 것을 제안한다. 특히 여성, 젊은이, 가난하거나 소외된 이들, 그리고 활동단체에 속한 이들만이 아니라 일상과 사회생활에서 신앙을 증거한다고 인정되는 남녀 평신도들도 포함시킬 것을 제안한다. 또한 현행 교회법에서 그 설립이 재량에 맡겨진 평의회의 경우, 설립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시노드 여정에서 많았음도 언급한다.
지역교회를 넘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연합들
의안집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모습이 지역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개별교회들 간, 나아가 동방교회와 개신교와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제안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주교회의에 대한 것인데,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각 사회 문화적 맥락에 적합한 전례, 규율, 신학, 영적 표현을 발전시킴은 물론 교의적 권위를 부여받은 교회적 주체로 주교회의가 인정되는 것이다. 주교회의의 교의적 권위 문제는 신학적 논쟁이 많은 주제이다. 이 외에 대륙 혹은 광역에서 결정을 위한 총회 개최, 결정 과정과 문헌 작성에 다양한 교회적 주체의 참여, 나아가 사회 조직들, 타종교 대표자들과의 경청과 대화를 위한 공간 마련도 제안된다.
일치를 위한 로마 주교의 봉사 그리고 탈중심화
지역교회의 중요성과 다양성의 인정과 함께, 주교회의에 교의적 권위까지 부여된다면, 교회 안의 일치를 위한 로마 주교(교황)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의안집은 교황의 수위권 교의를 재확인하면서, 교황이 시노달리타스의 보증임을 강조한다.(100항-101항) 의안집은 교황의 직무 수행 형태가 ‘건실한 탈중심화’의 전망 안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언급한다.(102항)
사실 지역교회의 강조는 탈중심화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탈중심화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기쁨」(16항)에서, 그리고 시노드 여정에서 여러 주교들이 제안했다. “목자들이 ‘스승’과 목자로서 ‘자기 고유 직무’를 수행하는 때에 그들이 잘 알고 있고 또한 교회의 일치된 교리와 규율과 친교를 건드리지 않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권한을 그들의 관할권에 맡기면서 늘 공동 책임으로 행동하고자 합니다.”(「복음을 선포하라」 21항)
탈중심화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로 로마 교황청의 교황과 주교단에 대한 봉사가 있는데, 의안집은 이에 대하여도 투명성과 설명책임의 원리가 적용될 것, 그리고 활동에 대한 평가를 제안한다.(105항)
세상 안에서 희망의 표징인 교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누구도 자족적이지 않으며 모두가 타자를 갈망한다. 이것은 의안집에 전제된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희망의 표징일 수 있다는 확신의 근거이기도 하다. 교회는 힘없는 이들과 곤경에 빠진 이들의 피신처, 폭우에 피난처, 폭염에 그늘이 되고자 한다.(이사 25,4 참조) 의안집은 어떻게 우리가 경청과 깊은 대화 안에서 살지, 어떻게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 소명에 비추어 공동책임성을 살아낼지, 어떻게 모든 이가 자기 몫으로 참여하고 공동선을 위해 각자 받은 은사를 공유하면서 교회 내 구조들과 과정들을 변화시킬지, 어떻게 교회 안에서 권력과 권위를 행사할지를 질문하고 있다.(111항) 이는 한국교회도 함께 고민할 질문일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4년 9월 1일,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0 10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