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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7-8: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장자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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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7)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장자호 신부 (상) 반세기 넘도록 한국에서 선교... 한국교회 성장 몸소 겪은 산증인
- 부제 서품을 받고 있는 장자호 신부. 장자호 신부 제공
서울 국제(외국인)본당 주임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장자호 신부(요한 가롤로·82)가 한국에 온 지 55년이 됐다. 고(故) 범덕례(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를 따라 한국에 와 선교한 세 조카 사제 중 한 명이었던 장자호 신부. 1969년에 이미 지구인이 달나라도 갔는데 자신이라고 선교지는 못 가겠나 싶었다는 당찬 그의 생애와 한국 생활, 선교 사제로서의 사목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작은아버지 따라 선교 사제가 되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장자호 신부는 1942년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근처의 시타델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장 신부는 그가 네 살쯤일 때 중국으로 선교를 떠난 작은아버지 범덕례 신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또 초등학생 시절 주일학교를 가면 본당 신부님이 전교 잡지를 자주 보여줬다. 덕분에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선교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장 신부는 196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그는 결국 바람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자원은 받지만 수도회 차원의 계획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기에, 당시 관구장은 장 신부에게 아르헨티나에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한국에 파견돼 있던 범 신부는 우연히 총본부 모임을 위해 한국을 떠나 관구장을 만나게 됐고,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니 조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범 신부의 부탁을 통해 장 신부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호랑이 아들 ‘장자호’
“성은 장, 이름은 ‘호랑이 아들’이라는 뜻의 아들 자(子), 범 호(虎)로 하자.”
외국인 선교 사제가 한국에 오면 한국 이름을 만들곤 한다. 장 신부의 본명은 잔카를로 팔다니(Giancarlo Faldani). 1969년 한국에 와서는 이름의 시작인 ‘잔’과 비슷한 ‘장’을 성으로 삼아 장 신부가 됐다. 그런데 첫 본당 보좌 신부로 갔을 때 할머니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범 신부님이 장 신부님 작은아버지라는데 어떻게 성이 다르지?”
이 말을 전해 들은 범 신부는 장 신부의 이름에라도 자신의 성을 넣자며 호랑이의 아들이라는 뜻의 ‘자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래서 장 신부의 별명은 ‘호랑이 새끼’가 됐다.
- 1986년 6월 5일 부산교구 대연본당 선교 25주년 축하식에서 장자호 신부(왼쪽 첫 번째)가 부산교구 초대교구장 최재선 주교(왼쪽에서 네 번째)와 범덕례 신부(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장자호 신부 제공
군부 탄압을 견디다
“제가 몰래 알려드리는데, 신부님 이름에 빨간색 표시가 있어요.”
한국에 와서 30년간은 부산교구, 대구대교구, 인천교구에서 각각 10년씩 본당을 맡아 사목했다. 주임신부로 있던 부산 대연동본당 옆엔 오륙도 나병환자촌이 있었는데 그 환자들의 자녀들을 수도원으로 데려와 돌보기도 했다. 아이들과 같이 놀고 생활하는 일이 참 보람 있었다.
장 신부는 한국에 그늘져 있던 군부의 탄압도 받았다. 특히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고(故) 지학순 주교(다니엘·1921~1993)가 1974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됐을 때,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시국미사에 참석했다가 사진이 찍힌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장 신부가 본당에서 강론할 때면 형사가 와서 감시하곤 했다. 장 신부는 “아마 강론 내용도 모두 녹음해 갔을 것”이고 말했다.
행정상의 불이익도 받았다. 한국 체류 기간을 연장하러 기관에 가자, 직원은 이 서류, 저 서류를 다 요청하며 절차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도 겨우 6개월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일을 보고 담당 직원과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장 신부가 절차를 왜 이렇게 어렵게 하냐고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그의 이름에 반동분자라는 표시가 있어서 그랬다고 몰래 알려줬다.
- 한국에서 함께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작은아버지 범덕례 신부(가운데)와 장자호 신부(오른쪽), 사촌 동생 배문호 신부(왼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강산이 다섯 번 변한 한국
“언젠가는 매년 두세 번 있던 세례식 때 100명 이상씩 영세를 준 적도 있죠. 내가 잘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국을 많이 축복하셨어요.”
장 신부는 한국교회 성장의 산증인이었다. 그가 입국했을 즈음인 1970년 신자 수는 약 79만 명이었지만 현재 신자 수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특히 1980년대에는 한해 약 7%씩 신자 수가 늘었다.
그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발전도 몸소 겪었다. 장 신부가 부산교구에 있던 1969년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경부고속도로가 서울-대전만 개통됐을 때였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비포장도로를 트럭으로 운전해 오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땐 서울에서도 강남은 논밭인 상황이었다.
2000년 대희년에 서울 국제본당으로 옮긴 장 신부는 외국인을 위한 새로운 본당에서 그의 사목 생활을 시작했다.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BLefPhnv3yk?si=BmLM170059klUFn6
[가톨릭신문, 2024년 7월 14일, 박효주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8)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장자호 신부 (하) "타향살이 외국인 신자 위로하며 신앙 갈증 풀어주려 노력했죠"
2000년 서울 국제(외국인)본당에서 새로운 사목 여정을 시작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장자호 신부(요한 가롤로·82). 2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국제본당 주임 신부다. 발령받기 전 20여년 간 한국에서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며 타지에 산다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보다 깊은 애정을 담아 외국인 교우들을 돌본다. 장자호 신부에게서 외국인 사목의 특별함과 선교사로서의 사명에 대해 들어봤다.
국제본당은 외국인들의 집이자 사막의 오아시스
“국제본당은 외국인들에겐 집 같은 곳, 또 어쩌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죠.”
부산, 대구 등에서 사목하던 장자호 신부는 2000년 서울 국제본당에 부임해 24년간 사목하고 있다. 국제본당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적응과 신앙생활을 도우며 타지 생활에 지친 그들의 심신을 돌본다. 장 신부는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본국으로 돌아갔던 외국인들이 가끔 성당을 방문하면 모두 여기를 집으로 여겼다며 추억에 잠기는 모습을 보곤 한다”고 말했다. 또 낯선 사막에서 목을 축일 물이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고도 했다.
장 신부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은 익히기 쉽지 않다 보니, 외국인들이 미사에 참례하거나 성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세워진 것이 국제본당”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제본당이 설립되기 이전에도 외국인들을 위한 미사는 있었다. 장 신부는 “첫 시작은 1970년대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외국 신자들을 위해 있었던 영어 미사”라고 기억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몇 년간 외국인을 위한 주일 영어 미사가 봉헌됐다.
그러던 중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새 임무가 부여됐다. 장 신부는 “1987년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우리 수도회 나승덕(빅토리오) 신부님에게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목하는 본당을 설립해 달라고 부탁하셨다”며 “이후로 우리 수도회가 공식적으로 외국인들에게 모든 성사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00년, 장 신부가 국제본당에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국제본당은 매 주일 다섯 개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장 신부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봉헌되는 미사를 만들어 신자들이 자기 문화권 언어로 된 미사를 찾아 드릴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이 덕분인지 부임 후 5년 만인 2005년엔 주일마다 500여 명의 외국인 신자들이 참례했다.
- 국제본당 첫영성체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장자호 신부(윗줄 가운데). 장자호 신부 제공
나 아닌 본당과 교우들이 먼저!
국제본당의 역할은 여느 본당과 비슷하지만, 타지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더 세심하게 신자들을 돌본다. 장 신부는 “본당 신부님들처럼 성사 집행하고, 사람들 만나고,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면서 “때때로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또 “한번은 가난한 교우가 병원에 입원해 병원비를 내지 못하자 본당 공동체가 돈을 모아 내주기도 했다”는 등 그들의 ‘한국살이’에 힘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쓴다.
“아무래도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있으면 조금 외롭고 어려우니 우리 본당이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어주려고 노력하죠”
20년이 넘게 본당 신부로 있다 보니, 처음 부임했을 즈음 태어난 갓난아기들이 그새 다 커버리기도 했다. 장 신부는 “오래 전 한 필리핀 가족이 아기를 낳았다고 해 축하해 준 기억이 있다”며 “바로 어제 그 필리핀 가족이 웬 젊은이와 함께 오랜만에 본당에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 젊은이가 그때 태어났다던 갓난아기”라며 웃었다.
장 신부는 하느님께서 감사하게도 건강을 보장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내가 82세인데도 이렇게 일하고 있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보다 교우, 본당을 위한 기도에 시간을 쏟는다. 장 신부는 “우리 신자들도 각자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며 “기도할 때면 그분들을 기억하고, 또 우리 형제들, 그리고 본당을 위해 자주 기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15년 전 심한 병치레가 있었다. 암이 발병해 두 개의 콩팥 중 하나는 떼어내야 했던 것. 장 신부는 “사실은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여전히 콩팥은 하나지만 그는 무사히 암을 극복하고 현재 건강한 것에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한다.
“콩팥 하나를 완전히 제거했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하나가 남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고, 사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답니다. 오히려 이 나이까지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 2005년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받고 있는 장자호 신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선교사로서의 모든 때에 하느님이 이끄셨죠
장 신부는 “이제 고향 이탈리아 생각이 자주 안 난다”고 고백했다. 해외에 나갔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면 오히려 집에 온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러더니 처음 두려움을 안고 한국에 오던 때와 당시 한국교회를 떠올렸다. 장 신부는 “내가 한국에 신부가 부족해서 우리와 같은 선교사들이 왔는데 지금은 한국 신부님들이 오히려 해외선교를 나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회상했다.
또 자신의 삶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던 예수님 말씀대로 이뤄졌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선교사는 하느님 말씀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기 위해 있기에 주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보내신 것도 그 뜻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선교사로 지원한 것은 장 신부 본인이지만 결국 서품을 받게 허락해 주고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장 신부는 그가 어릴 적 전교 잡지를 보며 선교의 꿈을 키운 것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것에 주님의 뜻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주님께서 여러 사건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드셨죠. 선교사로 자원할 때 주님이 제가 서품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도 나 자신을 당신께 온전히 바칠 수 있게 이끌어주셨던 거라고 믿습니다.”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s-MPYUuWh0s?si=h8BmEuWSz1k7wv0H
[가톨릭신문, 2024년 7월 21일, 이형준 기자] 0 2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