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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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22: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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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11 ㅣ No.1076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22) 빛을 담은 그릇 - 성모 마리아


‘카잔의 성모’ 이콘, 러시아인들에게 공경과 사랑 받아

 

 

- (작품1) 카잔의 성모 복사본, 66 x 55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1. 어머니와의 인연

 

어머니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포근함·그리움·아쉬움·모자람·후회 등을 연상시킵니다. 애틋하고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낍니다. 어머니와의 인연이란 불교의 겁(劫)1)을 떠올려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수천 겁의 교차점을 거쳐야만 부모와 자식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여인네의 옷자락만 스치려해도 몇 겁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다는 개념은 도무지 인간의 상식으로는 헤아릴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살 만하고 효도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즈음, 어머니께선 중풍과 치매로 거의 15년 동안을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느 봄날, 나는 어머니께서 불그레한 초로(初老)의 깨끗한 얼굴에 쪽을 찌시고, 얇고도 연한 녹두색 저고리와 연분홍 치마를 입으신 청초한 모습으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서울로 가시는 꿈을 꾸고 무척 불안해했었습니다. 시집가는 꿈은 돌아가시는 꿈이라던데⋯.

 

그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식으로서 못다한 효도의 골짜기가 너무나 깊어 한스러웠다고나 할까요. 훗날 어머니와 인연이 끊어진 순간을 추억하면서, 손을 입가에 얹고 앞을 바라보며 슬퍼합니다. 병고(病苦)로 온갖 고생을 하시고, 저녁나절 잠드신 채로 아무도 모르게 떠나가신 어머니. 마치 저녁 노을 지는 바다 저멀리 반짝이는 홍옥빛 파도 위를 날아가는 외기러기처럼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옛날 분들이 그랬듯이 장남만을 챙기는 분이셨습니다. 중학생 시절, 나름대로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 자식 편애가 심한 어머니와 앙살을 부리며 자주 다투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형의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한 놈, 속 좁은 놈이라고 야단치셨습니다. 동생들은 어리고 세 살 터울인 형과도 사이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참 외로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이라는 노랫말을 담은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노랫말처럼 내 어머니도 그곳 십자성에 계시고, 나를 반가이 맞아주실 것이라며 상상 속의 어머니를 그리워했습니다. 그 후 십수 년의 세월이 흘러 형님 내외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몇 년 지나지않아 실패하고 말았지요. 부모님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모두 탕진한 후 다시 시골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님과 형님 내외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겹치면서부터 어머니는 모든 형제자매를 골고루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고운 얼굴은 농사일로 찌들고, 여덟 식구의 생계 유지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무척이나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고생은 부모 된 자로서 오롯이 짊어져야 할 과정이었나 봅니다. 나도 두 아이의 부모로서 자식 키우는 어려움이 있어도 후회한 적 없이, 또 고통이라 생각지 않고 지나가는 과정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다만 나는 다행히도 애옥살이에 치인 어머니 시절보다 편한 시기를 거쳐왔습니다. 따라서 자식 키우는 것도, 먹고 입고 사는 것도 훨씬 수월했다는 사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

 

묶여있던 인연을 잘라내 동산에 오릅니다.

가시는 길, 생사를 가름 없이 두려움은 접어두고,

걱정과 시름일랑 잊으시라 공중에 띄워 보내오니

망각의 바다를 지나시며 이제는 자유롭게 되소서.

빛 고운 자주색 끝동, 잠자리 날개, 연두저고리

하얀 꽃신 위에 팔랑이는 금선 둘린 복사꽃 치마

나비같이 새색시 단장시켜 어머니를 보내오니,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하느님,

생전에 닦은 공덕은 천 배로 늘려 잡으시고

지나가 버린 죄과는 만 번을 깎아 셈하소서.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 내게는 서러워도,

비오니, 주님 궁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소서.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한 자식들도 노령과 병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며 다시 되돌릴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불 지필 장작이 없어 종이쪼가리만 태우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그라지는 불씨를 바라보며, 더 태울 종이조차 없어 손을 놓아버리는 심정이었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그냥 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촛불 같은 느낌이랄까!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다들 그러하셨더랬지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카잔의 성모님 (작품 1)

 

1579년, 러시아의 카잔이라는 도시 이야기입니다. 9살 소녀인 마트로나는 이미 허물어져 폐허가 된 집들 주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마트로나에게 폐허더미 속에 묻힌 어느 이콘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사실에 순진하기만 한 마트로나는 몸을 돌려 부모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소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린아이의 장난쯤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두 번째 발현하시자 소녀의 부모는 이웃집 몇 사람과 함께 소녀가 일러준 곳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땀 흘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트로나가 손으로 조금 더 파헤치자 낡은 천으로 싼 이콘이 나왔습니다. 분명 오래된 그림이었음에도 색깔은 아주 선명했고 알 수 없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은 도시 전체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대주교가 그 이콘을 들고 근처 니콜라우스 성당까지 화려한 행진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콘 앞에서는 곧바로 치유의 기적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그들은 카잔의 이콘이 1612년 폴란드 군대가 모스크바를 쳐들어왔을 때, 1790년 스웨덴의 칼 12세의 군대와 폴타바의 접전을 벌였을 때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전도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사랑의 부인’ 카잔 이콘에 그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나폴레옹 군대와 싸워 이긴 후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이 성스러운 이콘을 위한 고유의 바실리카를 세웠습니다. 그 성당 광장에선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종교적 유물과 예술품들은 강제로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그때 카잔의 성모 이콘은 폴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흘러갔다가 마침내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 이콘은 52년 동안 개인 소유로 이리저리 소장자가 바뀌었다가 1970년 푸른 군대에 의해 파티마의 비잔틴 교회에 모셔지고, 그 후 러시아에서 원래 모셨던 성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카잔의 이콘은 13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기서 가장 큰 가치는 러시아인들이 이 이콘에 보내는 경애(敬愛)입니다. 이 은총의 그림이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함께 공경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각주 1) 불교에서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시간 개념.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한 겁이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9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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