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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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 마리아의 선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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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16 ㅣ No.1167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 마리아의 선조들

 

 

‘어머니’ 하면 맘충, 맘카페, 아니면 반대로 경력 단절, 육아 지옥 하는 식의 단어들을 떠올릴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모성은 “극성스럽고 이기적”이거나 아니면 “희생해서 불행한” 아이콘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못 배우고 못 먹어도 그저 자식 잘 되는 것만 보면 행복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현실에서 찾기란 정말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예전보다 더 건강하고 똑똑하고 자아가 뚜렷해졌지만, 여전히 새로운 어머니 역할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이렇게 방향성을 잃었을 때는 다시 고전, 혹은 역사로 돌아가 보면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요. 성경에서 마리아가 언급된 부분들을 읽다 보면, 어머니 역할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 전승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우선 마태오 복음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특히 가부장제가 공고한 한국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족보가 어떤 의미인지는요. 족보에 이름이 오른다는 것은 그 가문의 공동체로 떳떳하게 인정받고 후손들에게도 기억되는 의미 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서자들, 첩들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방계이기 때문에 누락되는 경우도 있어서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만약 다윗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이 구성원 사이에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 신약이 기록된 이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기록된 족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싸움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과문해서 그런지 아직 그런 일로 집안끼리 싸움이 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읽은 바는 없습니다만.)

 

사뭇 장중하게 남자들만 기록되는 루카 복음의 족보 3,23-38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말고도 다른 부인들, 그것도 태생과 행적이 요즘 눈으로 보면 상당히 문제라 간주될 여성들을 대놓고 언급합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족이고 룻은 모압 출신 여자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는 히타이트 출신 우리야의 아내라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또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을 낳았던 사실들도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했고,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고 룻은 남편이 죽은 후 보아즈와 결혼했습니다. 밧 세바는 남편을 전사하게 한 다윗과 결혼합니다. 이 상황만 본다면 마치 막장드라마 같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왜 이런 여성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 놓았을까요. 저는 불륜으로 돌 맞아 죽을 위험에 몰릴 여성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땅에다 무엇인가를 써 놓는 장면을 읽으면서, 어쩌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조상 여인들,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았을 수 있는 그들의 이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속세의 윤리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부끄러운 이름들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적시해 놓았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 봐도, 예수님은 이미 탄생 이전부터 매우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우리에게 요구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잘 알려진 대로 마리아의 서사는 더 기구합니다. 나이 많은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동거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게 됩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불륜이요, 미혼모입니다. 당시 혼인 풍습에 의하면 마리아의 나이가 14살에서 15살쯤 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설령 성령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자면,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그런 가혹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중동, 인도와 그 주변, 중남미 등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 중에는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이 많은 남성에게 팔려가거나 납치되어 성매매를 강요받거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을 제공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아들에 비해 약한 어린 딸들을 가난한 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혹은 무식함과 무심함 때문에 버리거나 팔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는 여성과 모성에 대한 폭력적인 현대의 상황에 대해 떠올리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요셉은 이미 나이가 많아 전처소생의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성전에 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예수를 찾아간 형제들이 아마도 그 이복형제들이었겠지요. 어린 마리아가 나이 많고 가난한 목수에게 시집 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전처 자식들 역시 뒷바라지해야 했었다는 뜻입니다. 요즘처럼 자신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연히 그런 결혼은 거부했겠지요. 능력이 있다면 차라리 미혼모의 삶을 살겠다는 여성들도 늘어나는 추세가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는 그런 해결책은 상상도 못할 때입니다. 혼외 임신을 한 여성들은 돌로 쳐 죽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마 선한 요셉도 고민을 했었을 것입니다. 혼인을 취소할까, 그냥 살면서 몰래 잘 해결할까, 하는 인간적인 계산도 있었겠지요. 바로 그때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의식을 뛰어 넘는 꿈에는 무의식이 주는 지혜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더구나 신앙도 깊고 겸손한 요셉이니, 우리와 달리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만해서, 꿈속에서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겠지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아들 이름을 예수라 하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언, 그래서 그 이름이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사 7,13-17 참조)이라는 것까지 듣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의심과 걱정을 어쩌면 한순간에 없애셨던 거룩한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과 태도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신적인 존재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어린 예수님을 목숨걸고 잉태해 낳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키워냈으며, 마침내 그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지만 끝내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예수님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 참 어머니, 참 신앙인으로 깊이 사랑받고 존경받는다는 점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신자들이 자녀들을 더 많이 낳는다는 통계들이 많습니다. 모성과 부성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아이를 키우는데 공동체, 특히 종교적 가치관과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짐작하게 해 주는 사실입니다. 특히 과학주의적 관점에 몰입되어 있다면 아마도 성모 마리아 승천, 무염시태, 동정녀 같은 교리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는 과학주의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기적적인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마리아에 대한 존중은 인류가 모두 그리워하고 본받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엄청난 기적이자 신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에는 언어를 넘어서고, 역사와 공간을 넘어서는 숭고한 무엇이 숨어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데 얼마가 든다, 무엇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같은 말들이 넘쳐나서 마치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모두 돈이 없고 집이 없어서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려운 조건들이 많긴 합니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부모 자식 간의 숭고한 사랑마저도 조잡한 방식으로 돈으로 환원시키고 보이지 않는 행복의 가치는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어버이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같이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원형마저 무시해 버리는 사회와 집단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종교계 뿐 아니라 사회에서 모성, 혹은 어머니 역할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볼 경우, 그 사회는 결국 각박해지고, 인간 본성 속에 숨어 있는 잔인함이 부각되면 곁국 붕괴되는 경우를 세계사에서 찾아 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모성보다는 권력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당나라 측천무후나 청나라 서태후 같은 여성 리더는 당대에는 대단히 찬란한 문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따뜻한 아내도, 아이도 없었던 히틀러, 아내와 아들을 비참하게 죽게 했던 스탈린의 시대가 그러했지요. 혹시라도 이 시대 한국이 그런 시대는 아닐까요. 여성성과 모성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대우가 참혹하게 일그러진, 돌이킬 수 없는 중병이 든 시대는 혹시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월간 빛, 2024년 5월호,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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